멕시코의 정부 및 정치 형태에 관한 고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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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브리엘 안
작성일
2021-04-22 02:21
조회
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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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멕시코의 정부 및 정치 형태에 관한 고찰

논설문의 주제

멕시코의 역사적 정치 변천 분석과 비교정치학에서 다루는 보편적 6가지 준거에 따른 정치적 고찰

논설문을 왜 쓰려고 하는지

멕시코의 정부 형태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부 형태로서, 비교정치학적으로 다루어봄이 유의미하다 판단하여 본고를 작성하게 됨

참고할만한 논문, 자료, 키워드등 서술

비교정치학, 멕시코 정부론, 국제정치

내용 요약 (1000자 이내)

주권, 권위와 권력 (Sovereignty, Authority, and Power/정치적, 경제적 변화(Political and Economical Change)/시민, 사회, 국가(Citizens, Society, and the State)/정치기관 (Political Institutions)/정부 기구(Government Institution)/정책과 문제들(Policies and Issues) 과 같은 6가지 비교 준겅 따라 멕시코의 정치를 역사적 방면에서 고찰하고 평론하였음.


I. 서론
 1900년대 말 멕시코는 여러 개발도상국 국가들의 모범국으로써 평가되어왔다. GNP의 급격한 성장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부로 변화하며 “멕시코의 기적(Mexican Miracl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국제 원유 가격의 하락으로 멕시코의 경제는 급격히 낮아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민족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사살되기도 하고, 뇌물 수수가 판쳤으며 마약의 공급 또한 급증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경제적 생활력은 회복되었고 2000년대의 멕시코는 투명하고 경쟁적인 대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멕시코는 BRIC 국가 중 하나로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멕시코는 흔히 신흥공업국(Newly industrialing countries)으로 분류된다. 경제 지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도기적 민주주의로 평가된다.

II. 여섯가지 준거에 따른 멕시코의 정부 및 정치 형태 분석
 1. 주권, 권위와 권력 (Sovereignty, Authority, and Power)
  가. 역사적 특징과 정당성 (Historical Traditions Legitimacy)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의 멕시코 지역은 스페인 왕실에서 임명한 통치자가 다스렸다. 1810년 혁명 (Revolution of 1810)에 힘입어 1821년 독립 후에도 식민지 통치의 성격을 이어받은 군부독재는 20세기 초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10년 혁명으로 정부가 정당성을 취득하고, 1929년 제도혁명당 (PRI/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의 형성으로 헌법과 삼권분립이 자리잡았음에도 멕시코에서 권위주의 정부의 독재는 최근까지 자리잡았었다. 1988년 정전을 빌미로 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까지 일당체제를 유지했던 제도혁명당은 2000년에 이르러서야 대권을 야당에 넘겨주었고, 2006년에는 다수당의 지위까지 내려놓았다.
 오랜 식민지 통치와 그 후에도 이어진 군부독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 정치사는 그 유산으로 권위주의적이고 (Authoritarianism), 포퓰리즘적이고 (Populism), 엘리트중심적이며 (Power plays/divisions within the elite) 불안정한 (Instability and legitimacy issues) 성격을 가진다.
 *정치 문화
   1) 종교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religion) – 1920년대까지 기독교회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고, 혁명을 통해 직접적인 영향력은 줄었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이기에 대중에 대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2) 후견주의 (Patron-clientelism) – 오랜 군부독재로 인해 친정부세력과 정부가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는 정치적 내트워크 (Camarillas)가 발달했고, 곧 부패로 이어진다.
   3) 경제적 의존성 (Economic dependency) – 식민지 지배 시절에는 스페인, 최근에는 미국이라는 경제적 강국의 그늘에 항상 가려졌다.

  나. 지리적 영향 Geographic Influence
 멕시코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국부를 증대시켜줬지만 그 부는 극히 일부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미국과 맞닿은 2000마일가량의 긴 국경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나 분쟁이 생긴다. 수많은 산맥과 사막들로 인해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엔 멕시코 내부에서도 지역과 지역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고, 이는 장차 지역주의의 발판이 되었다.
 2. 정치적, 경제적 변화(Political and Economical Change)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 등장한 수많은 군부독재자와 선동정치가들로 인해 멕시코 정치는 오랜 기간 제자리를 잡지 못했다. 1910년까지 힘의 논리가 지배적이고 유혈사태가 빈번했던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후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정당의 등장으로 안정화되었다.
   1) 식민지 지배 시기 (Colonialism)
 스페인은 멕시코에 자리잡아 문화적 이질 (Cultural heterogeneity), 가톨릭주의 (Catholicism), 경제적 의존성 (Economic dependency)을 정착시켰다. 먼저 스페인인들은 아즈텍 문명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아즈텍의 수도를 점령하고, 스페인 출생자를 피라미드이 꼭대기에, 원주민을 하단에 위치시킨 계층구조를 구축했다.
 대륙에 발을 내딘 후 멕시코시티 주위에 정착한 대부분의 스페인인들과 달리, 사제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카톨릭을 전파하고자 했다. 전도사들은 방방곡곡에서 인구가 많은 곳에는 포교구를 세워 전도했고, 현재 대부분의 멕시코인들은 기독교이다.
 식민지였던 멕시코는 당연히 경제를 절대적으로 스페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페인인들은 멕시코에 묻혀있었던 방대한 자원을 가늠하지는 못했다.
   2) 독립, 새 국가 수립 (Independence/New Country, 1810-1911)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나타난 혁명의 물결 (Revolutionary wave) 시기에, 멕시코는 스페인 태생의 미구엘 히달고 신부의 주도하에 1810년에 혁명을 일으켰고, 1821년에 비로소 독립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불안정성 (Instability and legitimacy issues) – 스페인이 피라미드의 상위 계층과 함께 멕시코를 떠난 뒤 정부를 재정립하는 데 많은 혼란이 잇따랐다. 1833년부터 1855년까지 총 36명의 대통령이 있었을 정도로 멕시코 정부는 확실히 자리잡지 못했다.
-군사정권 (Rise of the military) – 멕시코 대통령이자 군 장군이었던 산타 아나 (Santa Anna)가 대표적이다.
-미국의 영향력 (Domination by United States) – 스페인이 빠지고 빈 땅을 미국이 재빨리 차지했다. 1855년에 멕시코는 영토의 절반 가까이 잃었고, 현재는 미국의 텍사스, 뉴 멕시코, 에리조나, 캘리포니아, 유타, 그리고 콜로라도주가 되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 (Liberal vs. conservative struggle) – 1810년 혁명을 기점으로 민주주의를 자리잡고자 하는 세력과 기존의 군부 독재 세력과 충돌했다. 대표적인 진보주의 대통령이자 멕시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베니토 후아레스 (Benito Juarez)는 막시밀리안 (Maximilian) 등 보수세력을 앞세운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멕시코 통치 (1864-1867)에서 해방시켰지만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3) 포르피리아토 시기 (The “Porfiriato”, 1876-1911)
 후아레스의 장군이었던 포르피리오 디아즈는 1876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재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멕시코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며 포르피리오는 ‘과학자’ (cientificos)로 불리는 젊은 지식인층들을 앞세워 34년 간 대권을 차지했고, 이 시기에 ‘과학자’ 세력의 주도 하에 과학과 경제 부분에서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다.
이 시기는 다음의 대표된다
-안정성과 권위주의 (Stability and Authoritarianism) – 포르피리오 디아즈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과 독재는 멕시코 내 잠시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지만 극소수의 엘리트만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해외 투자와 경제 성장 (Foreign investment and economic growth) – ‘과학자’들은 해외 사업가들의 멕시코를 향
-빈부 격차 심화 (Growing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급격하게 부가 축적되며 분배가 평등하지 않게 일어났다.
   4) 1910-현재
-20세기 초의 혼돈 (The Chaos of the Early 20th century) – 포르피리오 디아즈 대통령이 1910년 대선을 막으려 하자 지식인층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1910년 혁명을 통해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멕시코에 가장 큰 정치적 특징인 후견주의가 발달했다. 디아즈 대통령을 몰아는 과정에서 카우딜로 (Caudillo)라고 부르는, 각 분야의 권위자들이 정치인들에 반발하며 권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에밀리아노 자파타 (Emiliano Zapata)나 판초 비야 (Pancho Villa)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힘을 얻어 더 효과적으로 정국을 꾸려내려 했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주는 후견주의가 탄생했다.
 또한 1910년 혁명으로 헌법이 완전히 자리잡았지만 민주주의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정권 인사들의 암살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인민의 권리 또한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다. 정권을 차지한 진보주의자들은, 이전까지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기독교회를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사제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률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천명의 시민이 죽은 멕시코 역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인 크리스테로 반란 (Cristero Rebellion)이 일어났다.
 십수년의 혼란을 지나, 플루타르코 카예스 대통령 (Plutarco Calles)는 전국의, 그리고 각 분야의 카우딜로들을 모아 제도혁명당 (PRI, 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를 설립했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등 민주적인 것모습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 주요직을 모두 제도혁명당에서 차지하여 대통령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제도혁명당의 오랜 독재가 시작되었다.
 *카데나스 혁명 (The Cardenas Upheaval) – 대통령이었던 라자로 카데나스 (Lazaro Cardenas)는 1910년  혁명의 정신을 잃지 말고 이상을 실현시키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응답하여 토지재분배, 산업 국유화, 공공 사업에 대한 투자 확대, 농민 조합 및 단체 조직 격려, 대통령 권한 집중 등을 이룩했다.
카데나스의 국가주도적 발전은 ISI (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이라고 불리고, 현재까지도 국가조합주의 (State corporatism)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테크니코 세력의 등장과 진자론
카데나스가 대권에서 물러난지 6년 후, 미겔 알레만 (Miguel Aleman)이 진자론 (Pendulum Theory)를 주장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카데나스의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부정하고 경제적 민주화를 주장하며, 해외 투자와 사업 유치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알레만은 카데나스와 자신의 정책이 진자의 양 끝을 나타낸다고 했고, 1970년대에 멕시코가 진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테크니코 (Tecnicos)fk고 불리는 부를 기반으로 한 신진 세력이 제도혁명당 측에서 등장하여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추진했다.
1980년대, 멕시코는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정책을 펼쳐 자유 시장 활성화, 국가 예산 축소, 사유화, 자유 거래 보장, 국가 개입 최소화 등을 추진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멕시코는 투자자들에게 인기 있는 시장이 되었고,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국민총생산 (GNP)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였으며 이를 멕시코의 기적 (Mexican Miracle)이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석유파동으로 국제유가가 급락하며 페소의 가치도 함께 곤두박칠쳤다. 이를 계기로 제도혁명당 내에서도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세력인 폴리티고 (Politico)와 테크니코 사이의 격차는 커졌다.
 3. 시민, 사회, 국가(Citizens, Society, and the State)
  가. 분열(Cleavages)
 분열의 경향은 종종 다분화된(crosscutting)경향을 띄었으나, 최근 몇 년간 북부의 도시화된 중상계층의 메스티조(Mestizos)와 남부의 가난한 농촌지역의 아메리카 인디언(Amerindians) 와 같이 한쪽으로 편향된(coincided) 경향을 띈다.
첫 번째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다. 멕시코의 정치체제는 20세기에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촌에 거주했다. 제도혁명당(PRI)과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은 문맹 소작농에게 약간의 이익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7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비율(literacy rate)는 90%에 육박한다. 결과적으로, 도시의 유권자들은, 제도혁명당(PRI)보단 정치적/경제적 개혁(political/economical reform)을 원한다.
 두 번째로, 사회 계급간의 대립이다. 멕시코의 지니 계수는 0.47인데, 이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소득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37.5%를 가져간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저소득층의 유아사망률이 상승하고, 교육수준이 하락해 교육 격차가 벌어지며, 기대수명이 감소하는 등의 악영향을 낳는다. 최근엔 경제적 빈곤층이 비공식경제(informal economy)와 신산업(new industries)를 통해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고 있다. 경제적 중상위계층은 제도혁명당(PRI)이나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보다는 국민행동당(PAN)정당을 지지한다.
 세 번째로, 메스티조(Mestizos)와 아메리칸 인디언(Amerindian)의 민족 간의 대립이다. 메스티조(Mestizos)는 유럽인과 아메리칸 인디언(Amerindian)의 피가 섞인 민족을 의미하는데, 상대적으로 아메리칸 인디언(Amerindians)이 메스티조(Mestizos)에 비해 가난하기 때문에, 둘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네 번째로,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다. 북부는 건조하고 산맥이 많지만, 인구가 많고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부유하기에, 교육 수준이 높고, 시장경제를 선호한다. 그에 비해 남부는 아열대 기후이고, 미국의 영향을 덜 받아 가난하다. 북부의 경우, 평균 교육기간이 8.1년이지만, 남부는 6년에 불과하는 등의 교육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남부 거주민들은 제도혁명당(PRI)을 지지한다.
 현대의 추세는, 최빈곤층의 경제적 성장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니 계수가 0.53에서 0.47로 감소하는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계층간 정치적 지지 행위의 변화와 지역간 인종적 다양성 증가를 가져올 것이다.

  나. 정치 참여(Political Participation)
 멕시코는 전통적인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 정부였다.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에서 정부가 이익집단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이는 어느 이익 집단에게 특혜를 줄 지 말지를 정부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민들 중 일부만 정치 참여가 가능했고, 최근에야 시민들의 선거, 캠페인, 로비와 같은 대중들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1) 후견주의 (The patron-client system)
 후견주의(Patron-clientelism)의 뿌리는 19세기 군사독재자의 군벌주의에서 시작된다. 각기 지도자들이 까마리야(Camarilla)를 형성한다. 까마리야(Camarilla)란 공통의 정치적 이익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며 통치권 내에서 서로 의 기회를 높이기 위해 상호 의존한다. 까마리야(Camarilla)간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최고권력을 획득하게 되면 그는 모든 까마리야(Camarilla)의 리더가 되는데, 이 때 통치권 전체는 하나의 까마리야(Camarilla) 즉, 제도혁명당 까마리야 (PRI Camarilla)가 되는 것이다.

   2) 저항 (Protests)
 저항이 발생하면, 정부는 시민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시켰다(Co-optation). 예컨대, 1968년 틀라텔롤코 학살(Tlatelolco Massacre)의 경우,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학생들이 PRI의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968년 멕시코 민주화시위 대학살 50주년…수도 광장에 조기”, 연합뉴스, 2018년 10월 3일
. 학생들 2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는데, 차기 대통령이 다수의 학생 운동가를 행정부에 참여시켜 약자들에게 경제적 지원과 같은 사회 복지를 증진시켰다. 또 다른 예로써,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The Zapatista Uprising)를 들 수 있다. 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한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州)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 살리나스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준비하면서 대규모 사유화 계획을 1990년에 발표했다. 공공 자산뿐 아니라 농촌 공동체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도 매각 대상이 됐다. 그것은 농민들이 수십 년 동안 싸워서 얻은 권리였는데도 말이다.
 1994년 캐나다·멕시코·미국 대통령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발효를 선언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던 그 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사파티스타 봉기(The Zapatista Uprising)를 통해 토착민의 생활 기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전 세계 인민을 억압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 세계에 알렸다. 결과적으로, 대통령 빈센트 폭스(Vincent Fox)는 사파티스타인들을 정치에 참여시켰다.

   3) 유권자의 행동 (Voter Behavior)
 1990년대 이전에는 제도혁명당(PRI)이 지역, 민족, 국가적 차원에서 선거를 통제했다. 또한, 선거율이 매우 높았는데, 이는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의 정부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투표의 영향을 주는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첫번째는 지역이다. 북부의 경우에는 국민행동당(PAN)과 같은 우파정당을 선호하는데 비해, 남부의 경우 민주혁명당(PRD)이나 제도혁명당(PRI)의 좌파정당을 주로 지지한다. 두 번째는 교육/경제인데, 교육을 많이 받고 경제 수준이 높을수록 국민행동당(PAN)을 지지한다.

  다. 시민사회 (Civil Society)
 멕시코에는 항상 협동하기 거부하는 집단들이 있었다. 이러한 집단들이 모여 공공 항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의 기초가 되었다. 제도혁명당(PRI)은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의 실행을 통해 어떤 집단도 정부에 대항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PRI는 경영인들이 제도혁명당(PRI)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국민행동당(PAN)을 지지하면서 제도혁명당(PRI)의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는 붕괴했다.

 4. 정치기관 (Political Institutions)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국가 체제를 분류하기가 어려워졌다. 최근 몇 년 간, 멕시코는 6년 임기의 대통령이 마치 독재자 같은 역할을 하는 권위주의정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경제의 경우, 멕시코는 저개발되었고, 강대국에 의존적인 경향을 보인다. 정치 정당들은 더 경쟁적인 모습을 보인다.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가. 국가 체제(Regime Type)
멕시코의 국가 체제는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t) 구조이다. 여기에 까마리야(Camarilla)제도를 통해 중요한 그룹의 지도자들은 정부 고위 관료로 일했다. 변화의 방향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이다.
  
   1) “선진국, 신흥공업국, 개발도상국?” (“Developed,” “Developing,” or “LDC”?)
5개의 수치로 현재 경제 개발의 정도를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인당 국내총생산 (GDP)인데, 멕시코의 화폐로 구매하는 실제 재화와 서비스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2018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673 달러이다. 두 번째는 구매력평가(PPP)로 1년 기준 17,900달러이다. 세 번째는 인간개발지수(HDI)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비율(literacy rate)은 남자 96.2%, 여자 94.2%이고, 기대 수명은 남자 72.88세, 여자 78.55세이다. 네 번째는 경제 의존도이다. 멕시코는 미국에 일자리, 무역, 경영 측면에서 여전히 의존적이다. 마지막은 경제적 불평등이다. 지니계수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평등,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한 것을 의미하는데, 멕시코의 지니계수는 0.47인데, 이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수치이다. 다섯 개의 수치를 종합해보았을 때, 멕시코는 “선진국”(“Developed”), “신흥공업국(“Developing”), “개발도상국”(“LDC”) 중 “신흥공업국(“developing country”)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과도기적인 민주주의 (A Transitional Democracy)
국가가 얼마나 민주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4가지의 요소가 필요한데, 이는 정치적 책임 (political accountability), 정치 경쟁(political competition), 정치적 자유(political freedom),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을 의미한다. 정기적이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존재, 정당 조직의 자유로움과 후보자의 존재와 의견 전달의 자유로움, 의회와 조직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로움,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 참여를 통해 각 요소들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4가지 요소들을 종합해 본 결과, 멕시코는 2018년 민주주의 지수를 통해 결점이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의 형태라고 파악되었다.

  나. 기관들간의 연결(Linkage Institutions)
 멕시코는 정치정당, 이익집단, 대중매체 모두 시민들과 정부를 결합하기 위해 일했다. 멕시코에는 진정한 독립된 시민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1) 정치정당(Political Party)
 멕시코는 20세기 대부분이 일당 체제였다. 오늘날, 정당끼리의 경쟁을 통한 선거가 현실화되었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정당에는 제도혁명당(PRI), 국민행동당(PAN), 민주혁명당(PRD)가 있다
제도혁명당(PRI, 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은 1921년부터 2000년까지 세력을 지속해온 좌파정당이다. 폭력보다는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기로 한 정치적 엘리트들의 연합체로 설립되었다. PRI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조합주의 구조(corporatist structure)이다. 이익집단이 정당과 엮여 정당의 보호를 받고, 선택된 정당의 이익집단으로써 정부에 input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으로, 시골 지역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2000년 대통령직을 국민행동당(PAN)에게 뺏겼으나, 2012년 다시 탈환에 성공하였다.
 국민행동당(PAN, Partido Acción Nacional) 1939년에 설립된 가장 오래된 우파정당이다. 1990년대 북부 일부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경영인들의 이익을 주로 대변하고, 중앙집권주의와 반성직자주의(anti-clericism)에 반대한다. 북부에서 강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지방 자치,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 축소,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 가톨릭과의 좋은 관계, 사교육/종교교육 지원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민주혁명당(PRD, Partido de la Revolución Democrática)은 제도혁명당(PRI)과 같은 좌파정당이다. 각 지도자들이 문제에 대해 나눠져서, 의견을 주고받기도 한다. 2006년 오브라도르의 대선 결과 불복으로 오브라도르를 지지하는 파와 지지하지 않는 파로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6년 대선에서 오브라도르는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대선에 불복하고, 저항 정부 대통령에 취임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2) 선거(Elections)
 멕시코 시민들은 대통령, 국회의원 (상원의원, 하원의원) 주지사,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도시 지역에서 가장 경쟁적이다. PRI의 통제 하에, 선거는 일반적으로 부정선거였으며, 후견주의(patron-client system)이 이익집단과 정부간의 부정부패 (뇌물-특혜)를 장려했다. 더 도시적이고, 교육받았고, 다국적인 인구가 사는 곳일수록 공정한 선거를 원한다. 새로 만들어진 경쟁적 선거제도는 제도혁명당(PRI)의 좌파나 우파를 형성하기 위해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한다.
   
    가) 멕시코 유권자 분석 (Voters Profiles of Mexico)
 제도혁명당(PRI)은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들,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 나이 많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주 지지층이다.
국민행동당(PAN)은 북쪽에 사는 중산층, 전문직/경영직 종사자, 도시 거주민,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종교인들이 주 지지층이다.
 민주혁명당(PRD)은 젊은 사람들,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 중앙 주 출신의 사람들, 약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작은 마을 또는 도시 출신의 사람들이 주 지지층으로, 중앙에 위치한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강하게 지지받는 정당이다.

    나) 2009년 중간선거 (The Mid-term Election of 2009)
국민행동당(PAN)과 민주혁명당(PRD)은 상당 수의 의석을 잃은 반면, 제도혁명당(PRI)은 의석수를 거의 두배로 늘렸다. 또한 6개의 주지사 자리에서 5개 주지사 자리를 제도혁명당(PRI)에서 가져갔다.

    다) 2012년 연방선거 (The Election of 2012)
 멕시코는 경쟁적인 다당제를 전보다 더 발전시켰다.
제도혁명당(PRI)은 정치계에서 중요하지만 지배적이지는 않은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라) 선거시스템 (Electoral System)
 대통령선거와 같은 경우, 소선거구제를 통해 표를 더 많이 받은 쪽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의회 선거 같은 경우,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같이 사용하여 선거를 진행한다. 상원 의원 같은 경우, 각 주마다 3명의 상원의원과 비례대표 32명을 선출하는 방식을 택한다. 하원 의원 선거 같은 경우, 300명은 소선거구제를 통해, 200명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한다.

  다. 언론(The Media)
 언론은 정부를 비판하거나 여론에 영향을 미칠 힘이 거의 없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특혜를 주고 기자, 작가, 언론인 등의 급여를 지원하였고,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언론사는 거의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언론이 더 독립적이게 되며 언론의 역할을 확실히 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토알라게이트 스캔들” (“Toallagate” scandal)과 “요소132”(“Yo soy 132”) 운동이 있다.

 5. 정부 기구(Government Institution)

  가. 서문 
 멕시코는 연방공화국이지만 주 정부의 독립적인 힘은 강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멕시코는 강력한 대통령 권한을 바탕으로 한 행정부를 중심으로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의 결정을 따라 거수기 노릇(rubber-stamping)을 하였다. 멕시코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전래의 나라는 권위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이었다. 1980년대부터 정부와 시민들은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고, 현재 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찾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 정부의 공적 권력이 늘어나는 점이 중요한 변화로 꼽히고 있다. 1917년 헌법(Constitution of 1917)에 따르면, 멕시코의 정치 기관들은 미국의 것을 모방하고 있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각자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맞추며 각 기관의 장 (대통령, 국회의원, 주지사 등)은 시민들에 의해 직선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멕시코의 시스템은 미국과 차이를 보인다. 멕시코 헌법은 매우 길고 쉽게 개정되었으며 정부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나. 행정부
 2000년 대선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제도혁명당(PRI)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 대신 국민행동당과 민주혁명당의 연합 후보인 빈센테 폭스(Vincente Fox)가 4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됐다. 이 선거는 예측을 빗나갔고, patron-clientelism의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6년에는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on)이 3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어 연립 내각을 꾸렸다. 2012년 제도혁명당의 페냐 니에토(Pena Nieto)가 3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페냐 니에토 행정부는 재계 인사들로 꾸려진 기술관료들과 제도혁명당 인사, 그리고 소수의 정당 밖 인사로 구성되었다.
제도혁명당이 만들어진 이후 멕시코의 정책결정은 대통령에 집중되었다. Patron-client system의 대통령은 6년간 독재자로서 행동했다. 이를 sexenio라고 부르는데, 스페인어로 ‘6년간’을 뜻하며 중임 불가한 6년 임기를 말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멕시코 대통령들은 비판할 수 없고 국가 발전과 행복의 상징으로서 칭송 받아왔다. 대통령은 전대 행정부의 내각에서 뽑혔다. 최근의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멕시코 대통령의 권한은 매우 강하게 남아있다.
 빈센트 폭스는 지지하는 이익집단 없이 정부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의 전임자 어네스토 제디요(Ernesto Zedillo)는 민주화의 압박 속에 전통적인 대통령 권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제디요는 다음 후임자를 발표하지 않았고 당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폭스는 임기 동안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비판은 계속해서 받았다. 2012년 선거에서는 제도혁명당 후보가 다시 당선되었으나 의회에 다수를 차지하지 못함으로서 3당체제가 꾸려지게 되었다.

  다. 관료제
 멕시코 인구 중 약 1.5백만명이 멕시코의 연방 관료에 참여한다. 관료들은 큰 급여를 받지 않으나 중상류층의 큰 권력을 지니고 있다. 제도혁명당 하에 관료들은 patron-client system에 묶여있고 뇌물수수가 빈번했으며 내부 정부를 통해서 사적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제도혁명당 아래 준국가시설(para-statal sector)이 매우 많았다. 이런 기업들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사설 기업이나 멕시코 정부가 이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석유를 관리하는 국영기업인 PEMEX이다. 1980년대 이후 많은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었고, 폭스 대통령은 PEMEX의 민영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라. 입법부
 멕시코의 입법부는 양원제이다. 500인으로 구성된 대의원(Chamber of Deputies)과 128인으로 구성된 공화국 원로원(Senate)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의원들은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대의원은 3년의 임기를 갖고, 원로원은 6년의 임기를 갖는다. 대의원 선거는 300인의 지역구 의원과 200인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구성된다. 원로원은 31개 주와 멕시코시티에서 3명씩 당선이 되며 나머지는 비례대표제로 선출이 된다. 미국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1980년대까지 입법부는 대통령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제도혁명당의 독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 대의원 선거에서 제도혁명당이 아닌 당에서 240명의 의원이 배출되었다. 이후 대통령의 결정은 형식적으로 통과되지 않고, 거의 처음으로 의회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었다. 살리나스 대통령의 개혁은 점점 느려졌고, 멕시코 정부는 처음으로 그리드락(양측의 의견이 서로 팽팽히 맞서 업무 또는 정책이 추진되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1997년에는 제도혁명당이 원로원에서 과반수 차지를 실패했다. 2000년 선거에서는 양원에서 모두 다수를 차지했으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후 선거에서 계속해서 제도혁명당의 입지는 좁아 들어갔고 나머지 당들과 소수당의 의석 수는 증가세를 보였다.
 다당제의 발전에 따라 여성 후보자 배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었다. 2002년부터 정당은 비례대표 명부 중 30%를 의무적으로 여성으로 채워야 했고, 지역구 후보자도 그러하다. 지지율 회복을 위해 제도혁명당은 50%를 여성으로 채우겠다는 내부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군소정당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농업인’에서는 2006년 대선 때 파트리샤 머카도(Patricia Mercado)를 후보자로 배출했고, 국민행동당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호세피나 모타(Josefina Mota)를 후보자로 배출해 25%의 득표를 얻는 성과를 얻었다.
경쟁적인 다당제 체제의 구조가 발전하면서 멕시코의 의회는 더욱 더 중요한 토론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경쟁 구도가 발생하고 있고 ‘안정적인 자리(safe seats)’는 줄어들 고 있다. 입법부는 현재 행정부와 많은 대치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견제와 균형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마. 사법부
 멕시코는 독립적인 사법부나 위헌 법률 심사권이 없다. 많은 비영어권 나라들이 그렇듯 성문법을 갖고 있고, 1917년 헌법이 계속해서 이어지고는 있으나 쉽게 수정되었고 미국의 헌법만큼의 지배력을 갖고 있진 않다.
 멕시코는 연방법원과 주 법원이 있다. 그러나 주로 연방법원에서 재판이 이루어지고 주 법원은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지방분권이 더 활성화된다면 주 법원의 역할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연방법원의 최고법원은 대법원이고, 위헌 법률 심사권이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법원은 행정부, 특히 대통령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멕시코에서는 주로 대통령의 임기 시작에 법관들이 임명되는데, 이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니스트 제니요 행정부는 법과 규칙에 대한 강조를 통해 법원의 힘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시민들과 정부는 부패, 마약, 경찰 오용 등을 대항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관으로서 사용했다. 제디요는 많은 부분에서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주고자 하지 않도록 했고, 폭스는 독립성 있는 사법부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법부의 강화는 일반적인 시각인 법원이 부패했다는 점 때문에 막혔다. 멕시코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마약과의 전쟁을 하고 있는데, 지역의 여러 법관들은 갱의 보복에 두렵거나 응낙을 받아 올바른 판결을 하지 않는다. 칼데론의 개혁 중 일부는 이를 포함했다. 예를 들어 연방과 지방 법원은 구두로 재판을 하게 했고 검사와 변호사가 각각 입장을 대변하도록 하였다. 또한 공소 제도에 대한 변화로 다른 재판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공소를 하기 어렵게 했다. 2011년에는 대통령이 장기 목표로서 “멕시코의 미래는 이해할 수 없다”며 사법부 개혁을 삼기로 했다. 2013년에는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입법부에 일반범죄에 대한 전국적으로 통일된 형사법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바. 군대
 군 간부들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멕시코의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0년 혁명 이후 혼란과 폭력 이후 제도혁명당이 군의 영향을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1940년대까지 멕시코의 대통령은 모두 장군 출신이었지만 군과 정치의 분리는 계속되었다. 이는 제도혁명당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된다. 지난 50년간 군은 잘 훈련된 전문적인 집단으로 발전해 나갔다.
 군 개혁은 플루타코 카예스(Plutarco Calles)와 라자로 카르데나스(Lazaro Cardenas)에 큰 공이 있다. 그들은 장군들의 관할 지역을 순환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장군들의 지역적 기반을 만들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또한 patron-client system의 일환으로 정부와 군은 경제적인 교환을 했는데 이는 군 간부들이 정치적 권력이 아닌 경제적 이익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이렇게 군에게 이익을 나눠주는 행위는 군과 마약과의 관계를 맺게 했다. 최근의 군은 마약 추적을 막는데에 일조를 했고, 마약 거물들과 군 간부들 간에 관계를 쌓게 했다. 이에 따라 2009년 칼데론은 멕시코의 새로운 시스템인 국가 범죄 정보 시스템을 꾸려 모든 사람들의 지문을 수집하였다. 연방 경찰들은 공공에 대한 권력이 커졌고 니에토 대통령은 4만명의 군인들에 대해 연방 경찰로 일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 정책과 문제들(Policies and Issues)

  가. 서문
 멕시코 정부와 정책은 1980년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변하는 양상을 보였다. 정치적으로 민주 국가 틀을 확립하기 위해 진지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가 하면 1982년 경제 붕괴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경제 성장의 신호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멕시코 정부의 정책적 시도는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각종 문제가 발생하였다.
 멕시코는 정치적, 경제적인 지역적 취약성(regional vulnerability)을 극복하고 국제적 신뢰도(global reliability)를 찾고자 정치적 경제적 정책의 노선을 바꿨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선 변경이 미국과의 경제적 관계에 있어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변하게 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제도혁명당(PRI)이 정부와 오랜 기간 유착되어 있음에 따라 권력 분립 기관이 만들어지기 어려웠고, 중산층의 비중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빈부격차는 극심하다. 또한, 페냐 니에토(Peña Nieto) 대통령의 마약 거래와 폭력 등에 대한 제재로 미국과의 갈등이 빚어지는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멕시코는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에 있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독자성과 타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찾을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 멕시코의 경제
 멕시코의 경제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전반적으로, 2007년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1940년도에 비해 삶의 질은 크게 개선되었다. 살인율, 문맹률, 기대 수명 모두가 개선되었다. 1940년 이후 멕시코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멕시코의 기적(The Mexican Miracle)’이라고 부른다. 1940년에서 1960년 사이 멕시코의 경제는 연간 6% 이상 상승하였다. 공업 생산도 가속화되어 1960년대 평균 9%가량 상승했다. 농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에서 11%로 떨어진 반면, 공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서 34%로 증가했다. 이 모든 변화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동반하지 않고 진행됐다. 그러나, 멕시코의 산업화는 곧, 농촌 인구의 감소와 도시인구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도시 문제 발생으로 이어졌다.
 멕시코의 기적이 만든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빈부격차(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와 성급하고 무계획적 도시화(rapid and unplanned urbanization). 먼저, 빈부격차의 문제는 재빠른 경제 성장의 대표적인 결과이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평등과 사회적 정의 문제는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회 복지 제도도 매우 제한되었다. 소득 불균형 문제는 심각했다. 하위 40%의 인구가 총소득의 11% 이상을 벌지 못했다. 현재 이런 빈부격차는 많이 완화되었으나 아직 멕시코에 현존하고 있는 문제다. 두 번째로, 성급하지만 무계획한 도시화 문제는 경제 성장과 항상 같이 대두되는 문제다. 최근 수백만 명이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연방 지구(Federal District), 구아 달라하라(Guadalajara) 및 각종 도시들이 도시 문제로 앓고 있다. 도시 내 많은 인구가 수도, 정기, 하수 시설이 없는 거대 판자촌에 살고 있다. 빈약한 고속도로 계획과 대형 교통체계의 부재는 세계 최악의 교통혼잡을 만들어냈다. 또, 자동차와 공장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멕시코 시티의 공기를 심각하게 오염시켜 숨쉬기 매우 위험한 상태다.
 위와 같은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노력은 경제적 위기를 야기했다. 멕시코 정부가 유가가 영원히 높게 유지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아래 막대한 산업화 자금을 차관해오면서 경제 문제가 시작됐다. 1970년대 초반, 멕시코의 석유 생산량은 OPEC 국가만큼 증가했다. 그러나 1982년 유가가 급락하면서 멕시코의 경제도 위태로워졌다. 1987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의 빛은 107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 빛이 멕시코 GNP(국민 총생산)의 70%가량을 차지했다.
 경제적 문제들은 멕시코의 기적이 무색해질 정도로 또 다른 경제적 문제를 초래할 것이기에 멕시코는 경제 문제를 개혁해야 했다. 미겔 데 라 마드리드(Miguel de la Madrid) 대통령은 1982년에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테크니코(tecnico) 지도자들의 가치를 반영하는 대대적인 개혁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이런 노력은 살리나스 데 고 타리(Salinas de Gortari) 대통령과 세디요(Zedillo) 대통령의 임기 동안 이어졌다. 이런 개혁 시도 덕에 멕시코는 손에 꼽히는 극적인 경제 개혁을 이루어냈다. 개혁의 주요 내용은 정부 지출의 엄격한 감소, 채무 삭감, 사유화가 있다. 먼저, 멕시코 정부는 국제통화기구(International Monetary Fund), 세계은행(World Bank), 미국 정부, 그리고 각종 은행과의 협정에 따라 정부 지출을 크게 줄이는 재정 계획을 시작했다. 이로써, 수천 개의 일자리가 없어졌고, 수백 개의 기업이 없어졌다. 다음으로, 미국이 다국적 계획을 통해 차관에 대한 금리를 인하하고자 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관 문제는 여전히 멕시코에서 전염병과 같은 문제다. 멕시코는 여전히 연간 평균 100억 달러를 이자급부를 지급했다. 마지막으로, 시장 경제를 멕시코에 도입하기 위해 마드리드 정부는 정부의 경제적 힘을 줄이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많은 공기업을 사유화하고, 살리나스 대통령은 은행들을 민간부문으로 전환했다. 80년대 후반 구아 달라하라 대통령에 이르러서는 ‘작은 실리콘 벨리(The Mini Silicon Valley)’가 기술 기업들과 공장들이 설립되었던 IBM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멕시코 내 특별 법들이 제정되면서 값싼 노동력이 미국 회사들이 멕시코 기업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오늘날 멕시코의 경제는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석유 산업에만 의존하는 과거 경제 형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수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소득 불균등, 도시 계획, 그리고 환경 오염 등의 문제가 있다. 사업가로서 빈센트 폭스(Vincente Fox)는 선거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동안 멕시코의 경제를 연간 7%씩 성장시킬 것을 약속했다. 2001년과 2003년 미국의 9.11 사건 이후 경제가 위축됨에 따라 그의 공약은 좌절되었다. 물론, 2004년 경제 4.1%가량 성장했으나 40%의 인구가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펠리페 칼데론(Felipe de Jesús Calderón) 대통령은 2006년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멕시코의 석유 생산량은 크게 떨어지고 있었으며, 그 주된 이유는 새로운 석유 산업을 찾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PEMEX는 예산의 40% 정도를 제공하는 거대한 준국가기관의 기업이다. 그러나 PEMEX의 기술은 너무나도 쇠퇴한 상황이었다. 폭스 대통령은 PEMEX를 사유화하고자 시도했지만 수많은 반발을 겪었고 칼데론 대통령 또한 시도했다, 칼데론 대통령은 2008년 PEMEX에게 더 큰 예산 자주권을 부여하고 석유 산업에 대한 정부 규제를 강화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민간이 정유와 관련해 접촉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PEMEX가 정유 산업의 보관과 분류 관련 민간 계약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대통령의 개혁은 의회로부터, 특히 칼데라 대통령이 PEMEX를 국유화한 것에 대해 기소한 민주혁명당(PRD)으로부터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라는 더 큰 장애물로 인해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2009년 초, 멕시코의 경제는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2009년 첫 분기(연 총 4분기)에는 5.9%가량 경제가 축소할 것이라 추측했다. 대표적인 이유는 미국과 멕시코간의 긴밀한 관계 때문이다. 미국의 수요가 완전히 메말라버린 탓에 수출은 36%로 감소했다. 미국의 투자자들도 멕시코에서 사업을 중단하고 본국에 있는 자신의 사업체를 소생시키느라 바빴고 이는 결국 멕시코 페소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멕시코는 선진국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이는 멕시코를 크게 뒤처지게 하였다. 반면 시장 경제가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들과 교류한 브라질은 빠르게 경제 성장하고 있었다.
 2012년 선거 당시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PEMEX를 개혁하겠노라고 했다. PEMEX를 사유화하진 않되, 벤처 기업들과 민간 기업들과 협력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하며 PEMEX의 독점권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PEMEX는 2013년 두 차례의 폭발과 적자로 앓고 있었다. 2014년 정부는 민간 석유 사업 기업들을 불러 석유 탐사 연합을 꾸렸고 외국 기업들이 PEMEX와 협력하여 멕시코 석유사업에 대한 민간 투자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전기통신 분야에서도 멕시코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2013년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장기적인 전기통신과 방송 산업 개발을 위한 법률에 서명했다. 이러한 전기통신과 방송 산업은 대형 기업들로 하여금 경쟁심을 부추기고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끌 수 있다. 멕시코는 ‘Ifetel’이라는 규제 기관을 만들고 독점적인 기업들로 하여금 자산을 분배하도록 규제하고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당시 멕시코에는 무선 전화와 일반 전화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America Movil과 텔레비전 방송의 70%를 장악하는 Televisa SAB, 그리고 텔레비전 장송의 30%를 장악하는 TV Azteca SAB 등의 회사들이 이 분야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다. 외교 정책
 1982년 멕시코 정부가 멕시코의 수출과 해외 우수 품목에 대해 시장을 개방했을 때 멕시코의 경제에는 위기가 닥쳤다. 1982년 이후 정부는 외국인에 의한 자산 소유데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가 하면, 관세를 제거했다.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내놓으며 외국의 투자를 장려하고 멕시코의 민간 산업의 수출을 위한 생산을 장려했다. 현재 멕시코의 경제는 미국과 크게 엮여 있으나, 근래에 들어 멕시코의 지도부가 국제적인 포럼에 참여하는 등의 변화를 겪고 있다.
 멕시코의 공업 지대는 미국의 국경이 접해있는 멕시코의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다. 이곳을 마킬라도라(Maguiladora) 지대라고 흔히 부르는데, 마킬라도라에서는 미국의 소비자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고 미국의 기업이 이 지구에 새로운 공장들을 설립함으로써 물품들을 가공하고, 유통했다. 이 지구는 1965년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3국의 북미 자유 협정(NAFTA)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협정으로 인해 이 3국간 거래에서 무역 장벽이 제거되었다. 오늘날, 수 많은 노동자들이 이 마킬라도라 지구에서 일하고 있으며 멕시코의 20%되는 노동인구가 이곳에 배치되어있다.
 1980년 중반, 멕시코는 경제를 세계화하고 채무를 갚기 위해 많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무역 기구에 가입했다. 먼저, 멕시코는 GATT를 체결하고 WTO에 가입했다. 1986년, 국가간에 더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자조약인 가트(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에 따라 세계 무역 기구(WTO)가 설립되었다. WTO가 설립된 이후 멕시코는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북미 자유 협정(NAFTA)의 체결도 멕시코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협정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이 협정의 목적은 관세 제거와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통합이다. 멕시코는 이 협정을 통해 전반적 경제 성장과 국내 기업의 성장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익을 챙긴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멕시코의 값싼 인력과 자원들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으면서 크게 이익을 봤고, 멕시코는 이런 미국에 의해 다양한 문제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 멕시코간의 크고 작은 분쟁을 빚으면서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무역이 실제로는 좌절되고 있다.
 
  다. 이민 정책
 EU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NAFTA의 협정은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교환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폭스 대통령은 임기 초반에 미국과 멕시코간 이민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폭스 대통령은 이주 노동자를 위한 정책, 불법 체류자에 대한 자진 신고, 비자 문제 해결 등으로 완전한 국경 개방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미국내에서 멕시코 노동자들이 적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계획을 미국이 수리해주는 대가로 멕시코는 국경을 강화하여 추가적인 불법 이주민이 없도록 약속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이런 폭스 대통령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2001년 9.11 사건의 발생과 함께 좌절되었다.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행정명령으로 400만명의 불법 이주민들에게 미국에서 살고 일할 수 있도록 행정명령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보수적 법률 운동이 오바마의 행동을 저지했다. 이로 인한 연기가 결국 오바마의 임기 내에 계획의 실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하나의 이민 정책 문제는 중앙 아메리가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가는 길이다. 2015년 멕시코 정부기관은 ‘La Bestia’라는 길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 길은 멕시코 남부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 선로다. 정부는 기차는 더 빠르게 그리고 이동하는 이주하는 이주민들은 저지하는 정책을 실시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라. 마약 밀매
 마약밀매는 미국과 멕시코 양국이 겪는 대표적인 문제들 중 하나다. 마약 거래는 멕시코 정부의 부패를 만들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마약 밀매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거나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며 정부 기관은 부패하였다. 2005년 마약 관련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폭스 행정부는 부패한 정부 기관들을 개혁하겠다고 선언했고 이 선언은 실제로 많은 당국자들에 대한 체포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임기 동안 마약 간련 문제는 완전히 적출되지 않았다.
 칼데론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고, 갱단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들에 군대와 연방 요원들을 보냈다. 칼데론은 또한, 국가의 경찰 조직을 재구성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부패한 경찰관을 근절하고 지역 경찰들이 마약 조직들을 수사할 수 있도록 법을 개편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마약과 관련된 폭력이었다. 치명적인 살인이 발생하고 심지어 경찰 간부들조차 암살되었다.
 이에 대해 칼데른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마약이 문제가 되는 주요 도시들에 군대와 패트롤을 보냈다. 이 대책을 인해 파병된 군대가 일반 시민을 공격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8년 마약관련 폭력 사태와 무력 사태는 멕시코의 경찰이 암살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멕시코의 마약 전쟁에 동참했다. 2011년, 미국은 단순한 지원을 넘어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도입함으로써 그 역할을 확장했다. 또한, 미국 마약단속국(D.E.A.)과 멕시코 마약부 경찰(Counter-Narcotics police)과 연합하여 지배적인 마약 밀매업자들을 체포했다. 한편 2010년 살인율은 10만명당 17명에 이르렀으며 2007년보다 66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2010년 주요 마약 밀매업자들이 죽거나 체포되었고 2012년, 살인율은 2008년 초반과 비슷한 수치로 떨어졌다.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2014년 남서부의 주에서 43명의 학생들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멕시코의 법무부 장관은 그 학생들이 지역 경찰에 의해 마약 갱단에게 보내졌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고 밝혀졌다. 이 사건은 경찰들이 여전히 마약 카르텔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마. 민족적 혁명
 폭스 대통령의 임기 첫해, 그는 사파티스타(Zapatista)들과협상하기 위해 힘썼다.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은 1994년 NAFTA 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직업, 토지, 주거, 정의, 건강에 대한 국가의 보장을 요구했다. 이 사파티스타들의 군은 유명한 관광지를 포함한 수개의 마을을 점령하였고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현재는 이 혁명이 진행되고 있으나 많이 진정되는 추세를 보인다. 사파티스타 혁명은 민족주의에 기반했다. 아메리카 인디안(Amerindian)들의 메스티조에 대한 경멸이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도 있다. 현재 이러한 민족적 갈등은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바. 민주주의와 선거 개혁
 멕시코의 경제 및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정치 체제 내의 민주주의 전통의 발전에 있다. 멕시코의 권위주의 전통은 민주화에 역행하지만 경제의 근대화, 포퓰리즘의 정치적 가치, 민주혁명 충동이 작용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그 나라의 많은 지역에서 경쟁적이고 깨끗한 선거의 발전이다. 멕시코는 1990년대에 일련의 개혁을 거쳤는데, 이 개혁은 멕시코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도록 확고히 이끌었다. IFE라는 독립적인 선거 기관이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 기관은 제도혁명당(PRI)에 의해 지배되었었는데, 본래의 존재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
 1994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은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 제도혁명당(PRI) 후보가 티후아나에서 암살당하며 부정적으로 출발헀다. 제도혁명당은 재빨리 그를 에르네스토 제딜로 교체했지만, 폭력과 혼돈이 정치 질서를 위협했다. 현직 대통령의 동생이 암살에 연루됐고 고위 공직자들은 마약 밀매와 연계됐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딜로는 도전에 나섰고, 제도혁명당은 수월하게 선거에서 승리했다. 많은 사람들은 1994년과 2000년의 선거가 멕시코 역사상 가장 경쟁적이고 공정한 선거였다고 믿고 있다. 2000년 선거에서 국민행동당(PAN) 후보인 비센테 폭스(Vicente Fox)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71년간의 제도혁명당(PRI)의 우세를 마침내 뒤집게 된 모든 전례가 깨졌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2006년 선거는 분명히 경쟁적이었지만 민주주의의 기반을 위협하기도 했다. 오브라도르는 이 과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가 추종자들로부터 받은 강력한 지지는 불안정이 여전히 멕시코 정치체제의 일부라는 증거다. 그러나 선거법원이 법으로 정한 절차를 따랐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되기 위한 수순이다. 오브라도르의 정당인 민주혁명당(PRD)의 회원들은 결국 그의 행동에 대해 비난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멕시코 시민들이 이 결정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나라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증거다. 2013년 주 및 지방 선거 운동 중, 6명의 후보가 사망하는 등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또 다른 부상자와 가족, 정당 및 선거 운동 관계자들의 수많은 폭행 사건이 있었다. 이번 폭력사태는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새 정부에 당혹감을 안겨주었고, 야당 지도자들은 투표 절차와 유권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 주의 군을 거리에 배치하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대부분의 살인은 약물과 조직 범죄가 일어나고, 보호가 안된 취약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살인의 동기가 모호한 반면, 그들은 정치적 캠페인과 관련된 폭력을 이어가고 있다.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2012년 12월 취임 첫날 주요 3당 대표가 모두 서명한 95건의 느슨한 규정 제안서 ‘멕시코를 위한 팩트(Pact for Mexico)’를 공개했다. 비록 많은 정치 지도자들, 특히 민주혁명당(PRD) 관계자들이 대통령을 반대하지만, 그는 멕시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정당이 함께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페냐 니에토의 내각은 테크노크라트(tecnochrat)와 당에 충실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국민행동당(PAN) 재무 관료들과 민주혁명당(PRD)의 전 지도자 1명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도혁명당(PRI)의 대통령 복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가 경쟁적인 정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강력한 국가들, 특히 미국은 국제적인 세계 정치와 경제가 멕시코와 같은 국가들의 성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멕시코는 과거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강한 전통과 잘 발달된 민족적 자부심, 많은 천연자원, 그리고 아무리 고르지 않더라도 진보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자료 출처: Ethel Wood,AP Comparative Governement and Politics, 8th Edition.

“인웨이 자이 중궈 런타이둬(因爲在中國人太多, 왜냐면 중국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늦봄, 서울 종각 부근 어느 중국어 학원에서 연변 출신 조선족 강사 “우라오스(吳老師, 오선생, 가명)가 열다섯 명 쯤 되는 학생들을 향해 “중국을 알고 중국인의 마음을 읽으려면 꼭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표현”이라며 큰 소리로 따라 읽으라 했다.“인이 자이 중궈 런타이둬! (因爲在中國人太多, 왜냐면 중국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스무 살에 입대하여 10년의 군 생활을 했다는 우라오스는 중국어도 알기 쉽게 잘 가르쳤지만, 중국 관련 얘기라면 정치, 문화, 관습, 음식, 무술, 의학, 암흑가 무용담, 연예계 스캔들까지 그 어떤 주제라도 막힘없이 걸쭉한 함경도 사투리로 “군인정신”을 발휘해 소상히 알려주는 자타공인의 “중국통(中國通)”이었다.우라오스가 진도를 뽑다가 슬금슬금 옆길로 샐 때면 동학들의 얼굴엔 방실방실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어 급기야 한방 제대로 빵 때릴 땐 학생들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쾅 내려치며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여학생들 중에는 웃다가 눈물을 닦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누기든 중국 가서는 꿈에라도 범법 활동을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왜서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마약거래, 인신매매, 장기밀매, 금괴밀수, 불법도박 기타 등등, 그따위 악행을 범하다가 공안에 딱 걸리는 날이면, ‘즉결처형!’ 언도받고, 공개로 총살돼버리기 때문임다. 군에 있을 때 나가 공개처형을 현장에서 직접 감독을 해봐서 잘 아는데, 사형수가 잡혀 와서 총살을 당할 때는 맨 앞줄에다가 비행청소년, 불량배, 잡범들을 앉혀 놓고 ‘느그들도 악행과 망동을 계속하면 저렇게 총살당한다야, 잘 보라!’며 그 모습을 필시 지켜보게…
정치 스크랩 안유민 2022.07.11 추천 0 조회 290
2022년은 참으로 시끌벅적했던 한 해였다. 3월엔 20대 대선이 있었고, 지난 6월 1일에는 제8회 지방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선 윤석열 후보의 48.5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단 5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으며, 제8회 지방선거에서의 결과는 광역자치단체장 국민의힘 12석, 민주당 5곳으로 이전 민주당 14석과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2석과는 완전 결과가 뒤집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0대 남성(이대남)이 많이 거론되었다. 19대 대선에선 문재인 후보에 20대 남성이 47.6%의 지지율을 보여줬는데, 단 5년만에 20대 대선에선 윤석열 후보에 58.7%의 지지율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 6월에 시행된 제8회 지방선거에선 20대 이하 남성 65.1%가 국민의힘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단 5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20대 남성의 표심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창 20대 대선으로 뜨거웠던 2022년 1월 7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현 대통령)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고 7글자를 남겼다. 이 7글자 때문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그동안 일부 젊은 남성층에서 말로만하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통령 후보가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약으로 20대 남성의 표심을 잡아 당선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러면 왜 20대 남성들이 이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 열광을 표하는지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남성들에게 행해진 불평등에 남성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2017년 여성들이 당했던 성폭력을 용기내어 폭로하는 미투운동이 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운동때문에 자신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여 남성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사례도 등장했다. 그리고 2021년 9월 25일, SNS를 달군 하나의 이슈가 등장한다. 한국성범죄무고상담센터 페이스북에는 ‘땀 닦는 것도 공연음란죄로 잡아넣은 지하철범죄 수사과 그러나…
정치 스크랩 안유민 2022.06.11 추천 0 조회 397
이번 학기에 중국 수업을 개설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대학생들이 중국 역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좋든 싫든 전세계에서 중국이 하나의 ‘문제’로 등장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최근 학계에서 유행하는 중국 현대사 다시 쓰기 작업을 소개했다. ‘다시’ 쓰기를 쟁점화하려면 제국주의나 사회주의 혁명 등 기존 역사 서술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텐데, 온라인 화면에 동동 떠 있는 학생들의 얼굴엔 물음표만 가득했다.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법 ‘잘나가는’ 대학이 아닌가. 게다가 명문대 입학 준비는 유치원 때부터 한다지 않던가.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 필수과목이지만,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는 선택과목이다. 일국사나 유럽중심주의 편향을 넘어 세계 시민으로서의 공존을 염두에 둔 역사 서술이 돋보이지만, 다루는 범위가 넓다 보니 학생들이 선택을 꺼린다. 지난 5년간 수능에서 두 과목을 선택한 비율은 각각 10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학생들을 나무랄 게 아니라 교육 정책을 입시 대책으로 축소한 어른들의 책임을 묻는 게 옳다.학습 기회를 놓쳤다면 양국 간 교류를 넓히는 게 중요할 텐데 안타깝게도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고학번 학생들은 그나마 개인적인 여행이나 한-중 교류 이벤트에 참여한 경험을 언급하지만, 팬데믹 이후 입학한 학생들은 최근 읽은 책이나 포털에 등장하는 기사를 중국 이해의 주요 자원으로 삼는다.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중국을 문제화·사건화할지에 대해 언론의 책임이 막중한 때다.하지만 최근의 중국 관련 보도를 보면 언론이 ‘반중’ 제조업체가 된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다. 중국을 향한 시선은 ‘위협적인 중국’과 ‘기괴한 중국’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헤드라인은…
정치 스크랩 안유민 2022.02.08 추천 0 조회 2144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판문점 회담이 있었다. 회담장에서 생생하게 보여진 김정은 위원장의 행동과 육성은 폐쇄적인 은둔 왕조의 계승자라기에는 너무나 과감하고 솔직했다.누구는 ‘쇼’라고도 하지만, 그것이 쇼라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과하지 않을 명연기다. 그 어떤 연기도 현실보다는 사실적일 수 없다.김 위원장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연기라서가 아니라 북한 내부의 결정과 열망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북한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직전인 지난 4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개최했다.북한은 해당 회의에서 “ ‘핵·경제 병진노선’이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당과 국가의 전반 사업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지향하도록 하고 모든 힘을 집중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결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까?’핵·경제 병진노선’의 종결에 대하여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핵 무력 완성’ 주장이라는 해석이 주류가 된 듯하다. 그러나 이는 당과 국가 전반 사업의 사회주의 경제건설로의 전환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선언의 핵심으로  ‘핵·경제 병진노선’의 종결도 이와 연관지어 해석해야 한다.그렇다면 사회주의 경제건설로의 전환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0년 전 중국 공산당의 11기 3중전회를 떠올려야 한다. 이 자리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결정되었는데, 당시 개혁 선언의 원어는 개혁·개방이 아니라 ‘전체 당 사업의 중점과 전국 인민 관심의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의 전환’이었다.약간의 표현의 차이를 제외하면 조선노동당의 결정과 중공 11기 3중전회의 선언은 기본적으로 같다. 그렇다면 북한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혁·개방을 선언한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치 스크랩 화연그룹화연엔터 2022.02.05 추천 0 조회 1622
지난 100년간 총독부 통치와 독재 정권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국가’라는 통치기구가 잘못 작동하면 국민이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가의 과잉으로 힘들었던 우리와 달리 17세기 유럽은 국가의 결핍을 자신의 문제로 절감했다. 그들에게 올바른 국가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해결책이었다. ‘국가 만들기’를 화두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홉스다. 홉스의 사상은 ‘절대권력 옹호론’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진석용 옮김, 나남신서 펴냄)을 극찬한 이는 나치 독일의 이데올로그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였다. 책을 들여다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소문처럼 권력자만을 옹호하는 책은 아니다. 홉스의 사상도 시대의 산물이었다. 홉스가 절대권력의 출현을 염원한 데는 권력의 공백이 불러오는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홉스의 시대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얼룩진 때였다. 홉스가 서른이 되던 해, 유럽은 ’30년 전쟁’으로 빠져들었다. 30년 전쟁(1618~1648년)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유럽 전역에 걸쳐 약 80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을 정도로, 잔혹한 전쟁이었다. 영국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다. 내전은 1942년에 시작되어 1951년까지 이어졌다.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국왕의 일방통행을 반대한 의회파 사이에서 발생한 내전이었다. 내전 결과, 의회파가 승리해 찰스 1세는 처형당했다.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삼아 영국 연방을 세웠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롬웰이 죽은 후 다시 제임스 2세가 집권하고, 또다시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갈등은 결국 명예혁명까지 20여 년이나 이어진다. 영국 내전은…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1.11 추천 0 조회 1323
최근 중국 당국은 기존의 투자, 소비, 수출 중심의 수요 촉진 정책만으로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작년부터 과잉 생산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 중심 개혁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주축으로 강력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공급측 개혁 ‘이 노동에 주는 의미는 기업의 혁신과 구조조정에 따른 대대적인 해고다. 시진핑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중국은 향후 기업의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석탄 부문 노동자 130만 명, 철강 부문 노동자 50만 명을 감원할 예정이며, 정리 해고자 당수가 석탄, 방직, 기계, 군수 시설 분야 종사자이다. 향후2~3년 안에 5대 산업 500~600만 모의 노동자가 해고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이미 몇 년 전부터 경기 하락과 함께 주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대규모 석탄, 철강 기업이 밀집한 동북3성의 경우 경제 성장률이 전국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2015년 GDP가 -0.29%로 이미 경제 경착륙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노동자 임금과 연금 등 각종 사회 보험 체불 현상은 일상이 되었다. 룽젠 광산 기업의 경우 노동자 임금이 이미 40% 삭감되었고 6개월간의 임금과 2년간의 사회 보험비가 지급되지 않았다. 최근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항의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지역 주민들의 민심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올해 홍콩 매체를 통해 보도된 헤이룽장 쐉야산 룽메이 그룹 노동자들의 시위이다.룽메이 그룹은 헤이룽장성 4개 지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석탄 기업이지만…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1.04 추천 0 조회 1428
중국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이다. 중공이 마오쩌둥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평가했다는 그것이다. 선호에 따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누구를 ‘반신반인’이라고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우리나라의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자주 인용된다. 단언하건데, 중공은 결코 마오쩌둥의 공과가 7대 3이라고 평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왜 중공이 마오쩌둥의 공과를 7대 3으로 평가했다는 신화가 정설처럼 되어 있을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이 나온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실이 혼재되어 마오쩌둥의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무슨 말이냐고?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와 마오쩌둥의 후대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한 바람이 뒤섞여 중공이 마오쩌둥을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고 평가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는 1981년 중공의 11기 6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서 이루어졌다. 건국 이래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하여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중공은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서 문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렇다면 문혁에 대하여 가장 주요한 책임이 있는 마오쩌둥도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은 공산당과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을 초래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개혁과 국가의 전환을 위해서는 문혁을 부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과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의 위신을 유지하여야 하지만, 개혁을 위해서는 마오쩌둥의 위신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는 문혁을 부정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과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공이 7이요 과가 3이라는 논리가 나온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공은 마오쩌둥의 위신 유지와 문혁 부정이라는 모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원칙을 정한다. 우선은…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1.03 추천 0 조회 1809
최근 중국 공산당 영도체제에 대한 상반된 시각​작년 10월,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를 전후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당대회에서 시진핑 사상을 <당헌>에 삽입하고, 차기 지도자 사전 결정 규범을 파기한 후 정치국 회의에서 시진핑에게 공식적으로 ‘영수(領袖)’의 지위를 부여하고, 매년 시진핑 총서기에게 모든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이 의무적으로 서면보고를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올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에서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하고, 또 국가부주석에 시진핑의 오른팔인 왕치산(王岐山)을 임명하였다. 이런 현상을 두고 국내외 중국전문가들은 크게 2가지 상반된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일부에서는 집단영도체제가 해체되고 시진핑 1인영도체제가 들어서고 있다고 주장한다.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일부에서는 집단영도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운용상의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가?사진 1. 중국 공산당 제 19차 전국대표대회 개회 당시 인민대회당 모습출처: 신화통신의 당대회 보도 동영상을 DiverseAsia가 캡쳐. 동영상은 Youtube 제공.​중국 공산당 집단영도체제의 유지냐, 해체냐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 동안 중국 관변학자들은 집단영도체제를 미국 대통령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라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집단적인 정책결정의 원칙과 제도가 수립되고 실제로 운영되어야 한다. 이는 공산당 공식 조직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고, 또 각 조직 구성원이 동등한 발언권과 표결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1인 영도체제의 경우 당의 공식기구를 거치지 않고 지도자가 혼자서 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으나 집단영도체제의 경우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가진 당의 최고결정기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이 기구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당의…
정치 자료실 [인물] 정대성 2021.11.02 추천 0 조회 1194
[번역자 주] 많은 매체들의 보도는 중국을 ‘인권침해국가’로 지목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인식도 그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것은 일정 정도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이 번역의 목표가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 사안을 부정하고 반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해 인권침해가 없는 사회는 없다. 문제는 구체적인 해석에 있다. 무엇을 인권침해로 인식할 것이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권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할 것인가. 서구 사회의 기준에만 의거해 ‘인권침해’라고 낙인 찍는 방식은 실제로 인권을 증진시키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떠한 상태가 인권이 증진된 상태인가도 논쟁적이다.) 그래서 여전히 문제는 구체적 인식과 구체적 해석에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중국에서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이 구금되고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 소위 ‘인권운동가’들도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논쟁적인’ 글들이 삭제되는 것은 다반사다. (무엇이 ‘논쟁적’인지는 ‘그들’만이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작년에는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서 동성애 관련 내용이 금지 목록에 올랐다가 여론의 항의를 받던 중 <인민일보>의 이 평론 발표 후 정책이 번복되기도 했고, 올해에도 여성 동성애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인터넷 게시판이 당국에 의해 폐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이런 현실에서 2018년 4월 <인민일보>가 동성애를 지지하는 평론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한참 모순적으로 보인다. <인민일보>에서 동성애 지지 평론을 발표했다는 것은, 중국공산당 공식 기관지라는 위상을 놓고 봤을 때,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심지어 작년 11월 유엔의 보편적 정례인권보고(UPR)에서 중국 정부는…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27 추천 0 조회 1181
제헌헌법상 이익균점권과 재도입 검토작성일자: 2021.10.24.작성자: 장현규▶개요이익균점권, 이 단어가 익숙할지 낯설지 모르겠다. 이익균점권은 대한국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의 규정으로 그 내용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다. 이 조항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자본가가 기업에 자본을 출자해 기업의 이익을 일부 분배받는 것처럼, 노동자도 기업에 노동력을 출자하므로 그만큼 기업의 이익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헌 국회의원이었고 초대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던 우촌 전진한의 주장으로 명시된 조항이다. 그는 1953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의 제정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그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자유협동주의와 맞닿아있다고 보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막에 있어서 악사가 각자 법열 속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악기의 성능과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여 전체와 협동함으로서 하나의 심포니를 형성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기초에서 만들어진 이익균점권에 대해 알아보고 현대 대한국에 이익균점권이 시사하는 바, 그리고 그에 대하여 이익균점권을 재도입하는 것을 검토하여보고자 한다.​▶본론이익균점권의 사상적 기초는 개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촌 전진한의 자유협동주의와 맞닿아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를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을 현실적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 점부터 짚어보겠다.제헌당시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정치적 분열,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했던 국민적 과제로는 토지개혁과 적산(敵産)의 처리일 것이다. 이는 당시의 피폐한 경제상황의 극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산업구조를 살펴보면 대한국 경제의 대부분을 적산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걸 처리하는 방법 및 향후 관리에 있어 참여하고자 하는 근로대중의…
정치 회원투고 장 현규 2021.10.24 추천 0 조회 1836
군인노조와 군내 사조직의 경계(境界)작성일자: 2021.10.22.작성자: 장현규▶개요군인과 노동조합(이하 노조), 참 어색한 두 단어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특히 징병제 국가인 대한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한편 군인노동조합(이하 군인노조)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존재하는 나라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이 국가들은 전부 모병제 국가이다. 그렇다면 이 두 제도의 차이는 군인의 신분을 달리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군인은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이 자체는 옳은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권을 위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보장을 정치적 중립에 어긋난다고 보아야하는가 역시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대한국은 군내 사조직이 금지되어있다. 이는 군내 사조직이 정권을 탈취하고 독재를 일삼으며 기본권을 유린한 데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노조는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사조직이라면 영리조직인가 비영리조직인가? 이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본론군인노조란, 문자 그대로 군인들이 조직한 노조이다. 이 문장만 본다면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는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군인노조가 단순히 군인들이 조직한 노조로 성립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군인(여기서는 병(兵)을 의미함)의 신분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군인의 신분에 따라 노조의 설립 가능성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징병제 하에서의 군인과 모병제 하에서의 군인의 법적인 신분의 차이 여부가 있는지, 있다면 그 차이가 무엇인지 및 그 차이가 어디서 기인하는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동시에 직업군인의 노조의 설립은 허용되는가, 또 허용된다면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를 검토할…
정치 회원투고 장 현규 2021.10.23 추천 0 조회 1828
화춘잉(華春瑩)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27일 미국이 소위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규합하는 것은 인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은 자신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가져야 하고 걸핏하면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자처해선 안 된다고 일침했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지난 26일 미국 주도로 열린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냉전적 사고라며 이는 미국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을 겨냥해 발동한 ‘신십자군전쟁’이라고 주장했다.화 대변인은 이날 열린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관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면서 “미국이 이른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규합하는 실질은 이데올로기로 선을 긋고 집단정치를 벌이는 것으로 분열과 대립만 일으킬 뿐이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으로 인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화 대변인은 “우리가 수차례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핵심은 국민의 기대와 필요, 열망에 부합하는지와 국민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여부이지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니며 실제 효과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1%가 소유하고, 1%가 다스리고, 1%가 누린다.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미국 정치는 분열되고, 극단화되었으며, 하나의 미국은 다른 미국을 반대하고, 정부 지지율이 채 50%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국민을 속이고 국민의 신뢰를 남용하고 각종 공약을 난발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인가? 거짓말과 유언비어를 날조해 외국에 전쟁을 일으켜 보통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빈곤에 빠뜨리면서 방산업체나 대자본가들의 배를 불려준다.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무수히 많은 조지 플로이드를 경시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경시해 총기 폭력으로 죽게 만들면서 정부는 복지부동하다.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자신이 잘사는…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20 추천 0 조회 2311
18일 열린 외교부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보도에 따르면 미국 동부시간 10월 15일,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워싱턴 연설에서 미국의 대(對)중 입장은 명확하며, 미국은 필요하다면 중국과 경쟁하고, 미국과 전 세계 이익에 부합할 경우에는 중국과 협력도 하며, 필요하다면 중국에 도전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이를 어떻게 보는지”라고 질문했다.이에 자오리젠(趙立堅)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의 해당 발언은 늘 말하던 이른바 ‘경쟁’ ‘협력’ ‘대립’을 다시 언급한 것이지만, 그 본질은 경쟁을 내세워 중국을 제압하려는 ‘속임수’”라며, “그 저변에는 미국이 중국을 전략적 경쟁상대로 보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자오 대변인은 또 “중국과 미국의 상호인식 및 상생 방안은 양국 국민들의 근본 이익과 직결되고, 지역 국가와 국제사회에서도 촉각을 기울인다”면서, “중국은 일관되게 중미 양국이 폭넓은 공동이익과 거대한 협력공간을 가지고, 경제무역 등 분야에서 분명 경쟁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경쟁’으로 중미 관계를 전부 정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라고 밝혔다.그러면서 “미국이 계속해서 중국을 폄하하고 먹칠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고 또 탈동조화로 공급을 중단하고, 국가안보를 핑계로 중국 기업을 압박하는 것도 ‘경쟁’이 아니며, 중국 주변에서 계속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각종 반중 ‘소그룹’을 조직하는 것 역시 ‘경쟁’이 더욱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자오 대변인은 “미국은 냉전 제로섬 사고를 버리고, 중국과 중국 발전을 올바르게 바라보며, 중미 관계의 호혜윈윈적 본질을 깊이 인식해, 이성적이고 실무적인 대중 정책을 취해야 한다”면서, “미국은 중국과 함께 대화와 소통을 강화하고, 호혜협력을 확대하며, 원만한 이견 조정으로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윈윈의…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20 추천 0 조회 2189
국제사회는 중국 5개년 계획에 주목하면서 대중(對中) 협력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특색 사회주의 민주정치 실천 성과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14·5’(제14차 5개년 계획)와 2035년 장기 비전 목표 강요에 집중한다면 계획 건의 초안부터 계획 강요 초안 편제를 비롯해, 올해 전국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기간 대표위원의 계획 강요 초안 심사 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중국식 민주주의의 생동적 실천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왜 중국식 민주주의는 통하는 데다 효과까지 있을까? 이 문제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대와 현대는 물론 국내외 여러 실천 사례를 통해 인민이 주인되는 것을 보장하고 지지하며, 합법적 선거로 인민 대표가 국가 및 사회 생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선거 외 제도와 방식으로 인민들이 국가 및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는 것을 보여준다. 서방 일부 국가의 민주적 실천에서 인민들은 그저 투표권만 있지 폭넓은 참여권은 없기 때문에 투표 당시에만 고민할 뿐 투표 후에는 수면 상태에 빠져 버린다. 이러한 형식주의적 민주주의가 초래한 국가 관리의 국한성은 당연할 결과일 뿐 아니라 피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반드시 모든 것을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을 위하는 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통해 중국식 민주주의가 인민이 주인되는 것을 보장하고 지지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혜와 역량을 거버넌스 효능으로 전환해 수많은 인민들의 획득감, 행복감, 안전함이 더욱 충만하고, 보장되고 지속되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를 주시하는…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19 추천 0 조회 2898
• 유럽인들은 18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인들을 백인으로 불렀다.• 그러나 중국인과 일본인이 문화적 동화에 저항하자 그들은 모두 어두워졌다.-백인과 그들 자신들의 눈에서동아시아인들은 어떻게 황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세계를 인종적으로 지도를 그리려는 일련의 매핑의 결과였고 사람들의 실제 피부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사실, 초기 서양 여행자, 선교사 또는 대사(그리고 매우 자주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종 표식자로서의 피부색이 19세기까지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안색이 언급되었을 때, 동아시아인들은 거의 항상 백인으로 불렸으며, 특히 16세기 최초의 근대적 접촉 시기에는 백인으로 불렸다. 그리고 여러 번,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하얀”이라고 불렸다.황인이라는 용어는 18세기 말경에 가끔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19세기에 서구의 상상력을 실제로 장악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중국과 일본인들은 출판된 교과서에서 “어두워”에 지고있었고, 그들이 무역, 종교, 그리고 국제 관계의 유럽 시스템에 참여하기를 꺼릴 것이 분명해지자 점차 그들의 지금까지의 백색을 잃기 시작했다.다시 말해서 그들을 백인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단순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고 피부색보다 그들이 추정하는 문명, 문화, 읽고 쓰는 능력, 순종 수준(특히 기독교화가 되어야 하는 경우)와 관련이 있었다블룸바흐의 구상 중 가장 중요한 측면은 동양 모든 민족이 처음으로 명백한 인종 범주-몽고족으로 뭉뚱그려졌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서 몽골족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같은 순간에 도입된 훨씬 더 악명 높은 자매 용어인 코카시안처럼 위협적이고 운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1795년에 아시아인들이 황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몽골인들이 그랬다.따라서 “노란색”은 다른 색깔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
정치 회원투고 [인물] 정대성 2021.10.17 추천 0 조회 2731
중국 일대일로가 던지는 질문미·중 무역전쟁은 무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4차 산업혁명을 누가 주도할 것이냐 하는 기술 표준 전쟁이요, 글로벌 정세의 주도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전쟁의 성격도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중국식 세계화 전략에 대한 미국의 ‘응징’이라는 속성도 있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게 바로 일대일로의 사상적 바탕인 ‘천하주의(天下主義)’다. 중국의 철학 담론인 천하주의가 요즘 중국 학계의 뜨거운 화제로 등장한 이유다. 논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시진핑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건 2012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서였다. 당 총서기로 오른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련 공산당 해체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결론은 부패, 그리고 이념의 동요였다. 집권 이후 줄곧 ‘부패와의 전쟁’을 치른 것도,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 건설’에 나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념과 규율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당의 정치력을 회복하겠다는 뜻이다.시진핑의 또 다른 국가 사업은 ‘중국몽(中國夢)’과 ‘일대일로’다. 중국몽은 ‘중화민족의 위대했던 시기를 복원하겠다’는 국가 비전이었고, 일대일로는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복원하는 새로운 중국식 세계화를 뜻했다. 반부패와 당 건설, 그리고 중국몽과 일대일로. 이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진행되는 듯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철학적 담론으로 모아진다. 학계의 뜨거운 토론 주제로 등장한 ‘천하주의’가 그것이다. 천하주의는 ‘인종 및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는 문화와 가치 체제(a regime of culture and values)’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중국식 코스모폴리타니즘’인 셈이다. 반부패와 당 건설은 이를 위한 내적 역량의 결집 작업이었고, 일대일로는 천하주의의 표현이다. 강했던 한(漢)나라, 융성했던 당(唐)시기를 복원하자는 중국몽은 천하주의의 목표로 해석할 수 있다.2005년 자오팅양(趙汀陽)…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15 추천 0 조회 3384
우이판(크리스)의 체포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전 통보에서 베이징시 경찰은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확실히 밝혔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동이 철저히 조사되어 사실로 밝혀지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두메이주(都美竹)의 고소 내용을 보면 확실히 성폭력 사건이 성립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지인의 성폭력과 권력 침탈은 여전히 법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더구나 우이판은 톱스타이고, 경찰은 분명 조사 압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경찰이 수사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와 대중은 방법이 없다.연예 잡지 표지에 실린 우이판이는 놀라운 승리이다. 이 사건에서 경찰 당국은 우리가 주장해온 것들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우이판의 지지자와 반대자에게 승패가 갈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순간에 대한 축하는 궁극적으로 강대하고 지배적인 정부 권력을 다소간 칭송하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권력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나는 친구들과 함께 축하의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페미니스트들의 그룹채팅방에는 홍바오 폭탄(중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SNS 위챗의 기능으로, 용돈을 랜덤으로 퍼뜨릴 수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적 요소와 결합된 세배돈 기능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이 쏟아졌다. 듣자하니 내가 보낸 홍바오가 누구보다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실형 선고를 받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이판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신전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우이판은 지금까지 미투운동이 쓰러뜨린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이 성취로 인해 거리 곳곳에서는 “우이판이 구속됐다”는 말이 나올…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13 추천 0 조회 3707
지난 일요일, 나는 쓰촨 성 청두 시내에서 미국인 신사와 함께 있었는데,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그는 그의 중국 부인이 천안문 광장 학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나는 그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서구의 미디어 허위사실 캠페인이며, 왜 중국 언론이 거짓말의 전파를 허용해야 하는가라고 제안했다. 사실, 천안문 광장에서 어떤 대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베이징 근처에 살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중국인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천안문 광장에서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호주의 작가인 웨이 링 추아는 그의 잘 연구되고 분석된 책인 천안문 광장 “대학살” Tiananmen Square “Massacre”?: The Power of Words vs. Silent Evidence (Amazon, 2014)에서 서구 대중 매체와 서구 정부의 이야기에 도전한다. 그것을 읽는 것은 서부 대중 매체의 잘못된 정보를 삼킨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 일시적으로 멈추어 설 것이다.​추아(Chua)는 서양의 대중매체의 잘못된 정보를 폭로하고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 천안문 광장 시위는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경제 상황에 항의한 시위였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학살은 없었다.• 시위자들은 무장하지 않았다.• 폭동을 일으킨 것은 폭력 시위대였으며, 군인들은 아니었다.• 서방 언론인들은 말잔치 설명을 제공했지만, 사진 및 비디오 증거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추아는 BBC가 1989년에 죽은 그 어떠한 사람의 영상도 없이 말의 힘을 통해 “매 사살”이라는 인식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일부 학생 리더의 사악함 “실제로 우리의 소원은 피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시민들을 학살할…
정치 리뷰 [인물] 정대성 2021.10.12 추천 0 조회 2912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 Hong Kong Alliance in Support of Patriotic Democratic Movements of China; a.k.a. 지련회) 상무위원회가 1989년 창립 이래 32년만에 해산을 결의하였다.지난 8월 21일 해산 여부에 대한 내부 토론을 거친 지련회 상임위원회는 오는 9월 25일, 해산안에 대한 회원단체 투표에 들어가기로 했다.또한 지련회는 웹사이트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고, 계정 운영을 중단했다. 30년 넘게 매년 개최해온 집회 관련 동영상, 1989년 중국 천안문 시위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인터뷰 자료 등 수천 건이 지워졌다. 이는 경찰 당국의 명령 때문인데, 경찰은 “지련회의 게시물이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불법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의 포괄적이고 모호한 설명은 시민사회의 혼란과 운동의 위축을 야기한다.기실 지련회 해산은 그 수순이 예고된 것이었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통과된 후, 지련회 주석 리척옌(李卓人)은 지련회가 갖고 있는 모든 개인정보를 파기하고, 그간 지련회의 여러 출판 활동 결과물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 높은 탄압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진지를 지키며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이미 일종의 항쟁입니다”라고 덧붙였다.해산을 추진하겠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홍콩 경찰은 지련회에서 활동하던 여러 활동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지난 8월 25일 경찰로부터 자료 제출을 요구받은 지련회 활동가들은 열흘이 지난 9월 5일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요구하는대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활동가들은 “지련회는 외국세력의 대리인이 아니”며, 경찰이 아무 증거 없이…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03 추천 0 조회 765
※ 역주 : 지난 4~6월 중화권 인터넷에는 ‘탕핑’, ‘탕핑족’, ‘탕핑주의’ 등의 신조어들이 등장해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글은 「躺平:城市新贫困阶级的非暴力不合作运动」을 번역한 후 적절히 교정한 것으로, ‘탕핑’에 대한 해설이다. 저자는 대륙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필자로, 짐작컨대 <적과 흑>에 나오는 줄리앙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저자 나름의 해석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탕핑’ 논란에 대한 입장 중 하나로 참고해볼만하다고 여겨 플랫폼c에 소개한다.글 : 줄리앙번역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탕핑(躺平)’은 이번에 처음 등장한 신조어는 아니다. 일찍이 2011년, 중국의 포털사이트인 바이두 커뮤니티(百度贴吧)에 ‘반혼바(反婚吧)’라는 게시판이 만들어졌을 때 이미 등장한 바 있다. 2016년에는 연예인 팬덤 내부에서 ‘탕평임조(躺平任嘲; ‘아무렇게나 누워 비웃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역주 : 당시 이는 “열성 팬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냥 비웃기나 해라” 정도의 뉘앙스를 가졌다.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등장했다면 애꿎은 스타일리스트 탓하지 말고 그냥 누워서 빈정거리기나 하자”는 뉘앙스를 뜻했다.] 또 선전의 임시직 노동자 집단 ‘싼허다션(三和大神)’의 이틀 일하고 닷새 쉬는 삶(做二休五)에 대한 조롱과 자조 섞인 풍자 글들에서 ‘탕핑’은 이들 대도시 신세대 농민공들이 구조적인 착취에 저항하고자 취했던 일종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기도 했다.[역주 : ‘싼허다션’의 “이틀 일하고 닷새 쉬는 삶”은 결코 유유자적하는, 아름다운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연안지대의 대도시에서의 일자리도 그만큼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 나아가 신세대 농민공들이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삶을 개선하기 어려워 자조하게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싼허다션의 이와…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10.02 추천 0 조회 706
파라그 카나는 점점 더 아시아인들이 실용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통치를 선호하고 있으며 정치인들보다는 공무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다영원히 기억될 2016년 이후,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2017년에 유럽에서 더 많은 포퓰리즘 선거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으며, 트럼프의 계획된 무역정책으로 인한 세계적 여파는 말할 것도 없다. 세계 경제 성장 둔화와 지정학적 긴장 고조 등이 맞물려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촉발시킨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 세계가 가고 있다고 가정하기는 너무 쉽다.그러나 서방세계에게 참인 것이 정부가 일반적으로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견지해 온 동양을 무너뜨릴 이유는 없다. 그 차이는 단지 정치 그 이상이다; 그것은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가 삐걱거리고 있는 동안, 아시아의 더 기술관료적인 정부들은 기반 시설, 교육 및 일자리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아시아와 세계 모두에게 좋다.서양에게 참인 것이 동양을 탈선시킬 이유가 없다.서구와 특히 미국의 이야기에서, 깊은 안일함이 만연하여 정치와 통치, 민주주의와 전달, 그리고 과정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다. 좋은 정부들은 똑같이 입력과 출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합법성은 정부가 선출되는 과정과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원하는 것을 전달하는 과정, 즉 견고한 인프라, 공공 안전, 깨끗한 공기와 물, 신뢰할 수 있는 교통, 사업하기 쉬운 환경, 좋은 학교, 질 좋은 주택, 신뢰할 수 있는 육아, 표현의 자유, 일자리에 대한 접근, 그리고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원하는 것을 전달하는데 있다. 아시아의 기술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일들을 하는 데 지연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치 스크랩 [인물] 정대성 2021.09.26 추천 0 조회 1724
어떤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던 간에,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 철저한 ‘실패’로 귀결됐으며, 그로 인해 혁명에 대한 거대한 ‘환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과제가 간단명료하게 성취될 수 있는 과제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여전히 그것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며 등장했던 몽롱시의 시구들만큼이나 모호하고 난해하다. 더구나 그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목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그것의 ‘실패’와 ‘환멸’로 인해 누가 열매를 얻었고(혹은 현재 그 열매를 누리고 있고), 누가(그리고 무엇이) 좌절했는지는 그야말로 모호하며, 때문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이와 관련하여 볼 때, 1956년 흐루시쵸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행한 비밀보고 내용이 알려지면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던 당시 모택동의 반응 중에는 자못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탈린의 문제를 스탈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스탈린의 ‘시대’의 역사적인 문제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발언의 배경에 어떠한 정치적 판단이 깔려 있었든지 간에, 이 관점 자체는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 수많은 역사적 문제들을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몰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야 수지가 맞는 속편한 처리방식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맞은 오늘날, 문화대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기술을 위해 다시 한 번 되새겨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의 수많은…
정치 자료실 [인물] 정대성 2021.09.23 추천 0 조회 3699
중국의 노동운동과 노동관계, 노동조직에 대해 연구해온 홍콩대학 박사과정 연구생 팡란(方然)이 지난 8월 26일, 광시좡족자치구 난닝에서 국가안전부 요원들로부터 체포됐다. 국가안전부는 공안부와는 다르게 첩보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다. 팡란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지난 9월 1일 팡란의 아버지 팡젠중(方建忠)에 의해 알려졌다. 팡젠중은 자신의 웨이신(wechat) 계정에 며칠 전 아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의 아들은 “절대로 아무 동기가 없고, 법을 어기고 규율을 어지럽게 하는 활동에 종사할 어떠한 조건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팡젠중에 따르면 팡란은 ‘지정된 장소에서 감시상태로 거주’(指定住所监视居住; under residential surveillance at a designated location) 조치가 되었다. 중국 형사소송법 규정에 의하면, 이 조치는 중대 뇌물수수 혐의자나 피의자가 현지에 일정한 주거 없이 거주할 경우, 두 가지 경우에 주로 적용된다. 경찰서 유치장이나 구치소가 아닌 곳에 따로 구금되며, 당국은 가족에게 수감 장소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변호인조차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올해로 26세인 팡란은 칭화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2013년(당시 18세)에 중국공산당 입당했다. 아버지 팡젠중은 “팡란은 당에 위해를 가할 죄를 범할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는 당의 사업에 협조하길 바라는, 용기와 기상이 가득한 청년입니다”라고 말했으나, 입당 후 8년이 지난 지금, 팡란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정권전복 선동죄(煽动颠覆国家政权罪)다.팡란의 체포가 알려진 후 홍콩대학 측은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적극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필요할 경우 팡란 선생과 그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입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학문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답변하지 않았고, 중국 사회를 연구하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을…
정치 자료실 [인물] 정대성 2021.09.19 추천 0 조회 732
UVS 학회 논설문 신청제목멕시코의 정부 및 정치 형태에 관한 고찰논설문의 주제멕시코의 역사적 정치 변천 분석과 비교정치학에서 다루는 보편적 6가지 준거에 따른 정치적 고찰논설문을 왜 쓰려고 하는지멕시코의 정부 형태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부 형태로서, 비교정치학적으로 다루어봄이 유의미하다 판단하여 본고를 작성하게 됨참고할만한 논문, 자료, 키워드등 서술비교정치학, 멕시코 정부론, 국제정치내용 요약 (1000자 이내)주권, 권위와 권력 (Sovereignty, Authority, and Power/정치적, 경제적 변화(Political and Economical Change)/시민, 사회, 국가(Citizens, Society, and the State)/정치기관 (Political Institutions)/정부 기구(Government Institution)/정책과 문제들(Policies and Issues) 과 같은 6가지 비교 준겅 따라 멕시코의 정치를 역사적 방면에서 고찰하고 평론하였음.I. 서론 1900년대 말 멕시코는 여러 개발도상국 국가들의 모범국으로써 평가되어왔다. GNP의 급격한 성장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부로 변화하며 “멕시코의 기적(Mexican Miracl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국제 원유 가격의 하락으로 멕시코의 경제는 급격히 낮아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민족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사살되기도 하고, 뇌물 수수가 판쳤으며 마약의 공급 또한 급증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경제적 생활력은 회복되었고 2000년대의 멕시코는 투명하고 경쟁적인 대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멕시코는 BRIC 국가 중 하나로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멕시코는 흔히 신흥공업국(Newly industrialing countries)으로 분류된다. 경제 지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도기적 민주주의로 평가된다.II. 여섯가지 준거에 따른 멕시코의 정부 및 정치 형태 분석 1. 주권, 권위와 권력 (Sovereignty, Authority, and…
정치 회원투고 가브리엘 안 2021.04.22 추천 1 조회 5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