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혁/2020] 유사한 역사를 경험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왜 다양한 정치체제를 갖게 된 것일까?
동남아시아 국가는 태국을 제외하고 모두 서구 열강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는 민주주의, 준민주주의, 권위주의 등 다양한 정치체제로 발전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가 과거 대부분 군주제나 왕정을 토대로 하는 권위주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는 매우 흥미롭다. 이 글에서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정치체제가 이렇게 다양하게 발전한 이유를 살펴보며, 정치체제별 국가의 특징과 민주주의 전환의 조건을 알아보고자 한다.
동남아시아에는 필리핀,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11개 나라가 있다. 이 나라들은 태국을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등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독립 후에는 민주주의부터 권위주의까지 다양한 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는 야당이 참여하는 경쟁적인 선거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베트남과 라오스, 브루나이는 야당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이다. 한편 싱가포르와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에서는 야당도 허용되고 선거도 실시되지만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매우 낮은데, 이들은 완전히 민주주의도 아니고 권위주의라 하기도 어려워서 준민주주의(semi-democracy)라 불린다.
더욱 흥미로운 은 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과거에는 거의 모두 군주제나 왕정을 기본으로 하는 권위주의 국가였지만 캄보디아와 미얀마 등은 준민주주의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은 민주주의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역사를 경험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이처럼 다양한 정치체제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어떤 나라는 여전히 권위주의로 남아있는데, 어떤 나라는 준민주주의로, 어떤 나라는 민주주의로 전환하였을까? 또한 태국은 군부가 통치하는 권위주의(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민주주의에서 다시 군사독재로 전환을 여러 차례 반복해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경제, 정치 둘러보기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나라들의 역사, 경제, 정치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식민지배를 받았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과도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할 때까지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지였으며,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미얀마는 영국 식민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가장 최근에 독립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는데, 1975년 독립을 선언하고 포르투갈이 떠난 후 인도네시아 영토로 강제 편입되었다가 2002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러한 식민지배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나라들에서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독립 이후 정치체제 수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경우 미국이 식민통치를 하는 동안 의회와 선거 등 미국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미국식 상하원 선거가 1916년에 실시되었고, 1935년부터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처럼 일찍 미국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필리핀에서는 독립 이후에도 대통령제와 상하원 양원제에 기초한 미국식 민주주의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영국이 지배한 미얀마의 경우에도 영국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어 1922년부터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독립 후에도 의원내각제에 기초한 영국식 민주주의 모델에 입각해 헌법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기간 중 네덜란드 정치제도를 경험한 인도네시아 역시 독립 이후 비례대표제와 의원내각제 등 네덜란드식 모델에 기초해 정치체제를 설계하였다.
한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지배한 프랑스는 식민지에 자신들의 정치제도를 이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국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독립을 이루었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한 나라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과연 식민지 시기 민주주의 정치제도들이 이식되었던 국가들에서는 독립 후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 가능성이 낮은 것일까? 먼저 오늘날 민주주의로 분류되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가운데 식민지 시기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는 없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시기 서구식 의회와 선거를 경험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권위주의로 분류되는 베트남, 라오스, 브루나이는 모두 식민지 시기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베트남 남부 사이공(오늘날 호치민시)을 중심으로 하는 코친차이나(Cochinchine) 지역에 한하여 의회 선거가 제한적으로 실시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식민지 기간 중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은 모두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하였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은 권위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동남아시아 정치체제에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이 상당히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완전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당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주의도 아닌 준민주주의 국가들을 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싱가포르,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은 모두 오늘날 현재 야당이 허용되지만 선거를 통해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매우 낮은 준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 이전에 서구식 의회 선거를 경험하였다. 태국은 식민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1932년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1933년부터 의회 선거를 실시해왔다. 이처럼 오랜 서구식 민주주의 경험을 가진 나라들이지만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부터 오랜 민주주의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나라는 민주주의를 이룩했는데 싱가포르나 태국과 같은 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하는 것일까? 역사적 경험의 차이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로 전환과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대표적 이론인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에 따르면 경제적 이유가 중요하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민주주의로 전환 가능성도 높아지고 수립된 민주주의의 안정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Przeworski et al., 2000).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제가 성장할수록 물질적 혜택보다 자유나 정의, 인권 등 비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부유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가능성을 높이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근대화 이론은 설명력이 높지 않다. 권위주의 국가들에 비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더 부유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1개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1인당 국민총생산(GDP) 중위 국가는 필리핀($7,943)이다. 필리핀보다 1인당 GDP가 큰 나라는 부유한 편이고 그보다 작은 나라는 가난한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민주주의 국가들 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부유한 편이나 동티모르는 가난한 편이다. 준민주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싱가포르와 태국은 부유한 편이나 캄보디아와 미얀마는 가난한 편이다. 권위주의 국가들 중 브루나이는 부유한 편이고 베트남과 라오스는 가난한 편이다. 따라서 부유한 나라일수록 민주주의 가능성이 높다는 근대화 이론으로는 동남아시아 사례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으로 체제 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들 사이의 공통점을 살펴본 후 체제 간 차이를 비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부터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