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은 16세기와 17세기의 세계 상황을 재검토함으로써 전통적인 “서구의 부상” 서사에 도전한다.
이 장은 일반적인 국제정치학의 가정과는 달리, 이 시대의 유럽 정치 체제가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심지어 명나라와 같은 동방 국가들보다 반드시 더 ‘근대적’이거나 ‘주권적’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동방 정치 체제는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되고 영토적으로 더 통합되어 있었다.
16세기의 세계: 유라시아의 관점
16세기에 이르러 몽골의 세계 질서는 대체되었지만, 그 유산은 유라시아 정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세 개의 주요 이슬람 화약 제국, 즉 오스만, 사파비, 무굴은 발칸반도에서 벵골까지 광활하고 상호 연결된 지역을 지배했다. 이 제국들은 공통된 정치적 어휘와 칭기즈칸-티무르 왕조의 전통에서 물려받은 보편적 주권에 대한 주장을 공유했다.
한편, 몽골을 전복한 명나라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이슬람권과 교류하면서도 그 경계를 분명히 했다.
러시아 또한 몽골과 비잔틴 제국의 유산에 영향을 받아 영토를 확장하고 주권을 공고히 하며 유라시아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16세기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통일된 기독교 세계라는 이상은 무너졌고, 국가들은 종교적, 왕조적 갈등에 휘말렸다. 신성 로마 제국은 복잡하고 분권화된 실체였으며, 프랑스와 스페인과 같은 강력한 군주국들조차도 권위에 대한 심각한 내부적 도전에 직면했다.
동서양의 주권 비교(1600년경)
정치적 중앙집권화: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과 같은 동방 제국은 대부분의 유럽 정치 체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보였다. 군주(술탄 또는 파디샤)는 최고 권위를 지녔으며, 종종 법 위에 군림했다.
유럽에서 통치자들은 강력한 귀족, 단체(길드와 도시 등), 그리고 교회의 제약을 받았다. 군주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동화주의적 중앙집권화(인구 동질화)는 당시 동서양 통치자 모두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민족과 다종교적이었다.
영토성:
유럽 국가들은 고유하게 ‘영토적’인 반면 동방 제국들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오해다.
동방 제국, 특히 명나라는 광활하고 인접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한 정교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상세한 지도를 제작했다.
반대로 유럽 국가들은 관할권이 중복되고 영토가 분산된 지역(외국 영토와 고립 영토)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명확하게 경계가 정해지고 통일된 국가 영토라는 개념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다.
외부 인정:
동양에서 지배적인 주권 모델은 단일 세계 정복 주권자(사히브크란)에 대한 보편주의적 주장에 기반했다. 통치자들은 징기스칸이나 티무르의 권위를 주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들은 서로를 국가 체제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고 보편적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는 존재로 여겼다.
유럽에서는 다른 체제가 부상하고 있었다. 보편적 기독교 황제 체제라는 이상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현실은 서로를 동등한 주권자로 인정하기 시작한 여러 경쟁 정치 체제였으며, 이러한 관행은 나중에 공식화되었다.
17세기 ‘총체적 위기’와 분열
17세기는 정치적 불안정, 전쟁, 경제적 혼란으로 점철된 세계적 위기의 시기였으며, 이는 유라시아와 유럽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유럽 국가들이 이러한 위기 속에서 독특하게 ‘근대화’되거나 ‘부흥’한 반면 동방 제국들은 단순히 ‘쇠퇴’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동방: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은 모두 심각한 내부 반란과 중앙 권위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중국의 명나라는 붕괴되었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러시아는 “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명나라를 제외한 이 제국들은 위기를 극복했지만, 보편주의적 야망은 약해졌고, 통치자들은 기존 영토 내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데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30년 전쟁(1618년~1648년)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재편한 파괴적인 갈등이었다.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1648년)은 종종 현대 국가 체제의 탄생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조약이 주권을 창출한 것이 아니라, 주권 국가 간의 상호 인정이라는 기존 관행을 성문화했다고 주장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가들이 서로의 내부 자치권과 영토 보전을 인정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독특한 유럽 국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것은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분열이라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결론: 흥망성쇠가 아닌 다른 길
이 장은 17세기 초 동서양 사이에 국가 역량이나 ‘근대성’ 측면에서 명확한 ‘대분기점(Great Divergence)’이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두 지역 모두 전반적인 위기를 겪었지만, 국제 관계 질서를 위한 서로 다른 해결책을 가지고 등장했다.
유럽은 상호 인정된 주권 국가 체제인 베스트팔렌 체제를 발전시켰다.
아시아의 강대국들은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팽창주의적 추진력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보편주의적이고 칭기즈칸식 주권 체제 내에서 이를 수행했다.
이러한 분기점은 ‘흥망성쇠’의 분기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과 질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베스트팔렌 모델은 유럽 문제에 대한 유럽식 해결책이었지, 아시아 제국들이 도달하지 못한 보편적 정치 발전 단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