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베스트팔렌 모델과 소수자 권리의 현실
크래즈너는 제3장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한다. 베스트팔렌 모델에 따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는 외부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형성되어야 하며, 외부 행위자의 개입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배자와 시민은 외부의 영향 없이 상호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 이들은 헌법에 개인의 인권을 명시할 수도, 이를 생략할 수도 있으며, 민족이나 종교적 소수자에게 특별한 권리를 인정하거나 그러한 집단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도 있다.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대우하거나 차별적인 처우를 할 수도 있으며, 원주민을 별개의 집단으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노예제를 인정하거나 금지하는 것조차 지배자의 자율적 결정 사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모델은 현실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지배자들은 외부 권위의 개입을 계약이나 협약의 형태로 초청해왔으며, 강대국은 약소국의 내정에 강압적 개입을 통해 영향을 미쳐왔다. 이 장에서는 베스트팔렌 모델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로서 소수자 권리를 분석한다. 소수자 권리는 지배자가 특정 집단에게,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개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적 약속이다. 종교와 민족이 가장 흔한 기준이지만, 일반적으로 소수자 집단은 개인의 정체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수자와 구별되는 집단적 특성을 갖는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소수자 권리 대부분은 강제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예외적으로는 17세기 유럽에서의 종교 관용처럼 상호 계약을 통한 경우가 존재한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같은 다민족 제국의 계승 국가들에게 종교적 소수자 보호를 조건으로 국제적 승인을 부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게 소수자 권리 보장을 강제로 요구하였으며, 이는 안정된 민주주의의 형성이 국제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에도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은 발칸 국가들에 대해 유사한 논리를 적용하여 소수자 권리 보호를 조건으로 국제적 승인과 지원을 제공하였다.
2. 소수자 권리 보호의 어려움과 외부 개입의 한계
국제 질서가 제도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다양한 원칙들이 상호 충돌하며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18세기 법학자 바텔(Vattel)조차 비개입 원칙을 정식화하면서도, 만약 부당한 지배가 내전을 야기한다면 외부 세력이 정당한 편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는 어떤 권위도 지배자가 외부 개입을 수용하거나 외세가 무력으로 타국의 내정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율성과 소수자 권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국 지배자들은 소수자 권리의 존재 여부, 보호 방식, 집단의 법적 지위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외부 개입을 통한 소수자 권리 보호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강압적 개입은 종종 실패하였다. 표적 국가의 지배자는 권력 기반이 약한 시기에 외부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였지만, 권력을 회복하면 해당 약속을 철회하였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국가 승인이나 국제기구 가입을 특정 조건 수용과 연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승인을 받은 이후에는 이를 취소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부의 강제는 시간에 따라 무력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속적인 압박 수단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이러한 개입은 장기적 효과를 담보하지 못하였다.
반대로, 계약에 기반한 초청 방식은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이는 양국이 서로의 소수자 권리를 보호하기로 약속하고, 위반 시 상호 대응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약속 이행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시간 경과에 따른 약속의 퇴색 가능성을 줄이고, 정치적 의무의 내실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협약(convention)은 주로 소수자 권리보다는 보편적 인권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효과는 국내 정치 구조에 따라 달라졌다. 협약이 국내 개혁 세력의 지위와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경우, 보다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였다. 지배자들이 자신의 선호를 제도화하고 후임자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하는 사례도 존재하였다. 또한 협약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정당화하거나, 감시 조항을 통해 비공식적인 위반을 어렵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특히 유럽 인권 체제처럼 개인이 자국 정부를 국제 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에서는 협약 이행의 실효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3. 소수자 권리 부과의 방식들
소수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외부의 개입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계약(contract)은 이해당사자들이 상호 동의하에 조건을 설정하고, 이를 서면 또는 구두로 명시하는 방식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이 서로의 신앙을 인정하며 공존을 도모하는 여러 종교 관용 협약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체결되었다. 이러한 계약은 지배자가 자발적으로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이행되었으며, 약속을 위반할 경우 명확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효성을 가졌다.
둘째, 강압(imposition)은 외부 세력이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특정 조건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하에서 중동부 유럽의 신생 국가들은 국제연맹 가입 및 국가 승인과 맞바꾸어 소수자 권리 보장을 강제로 수용하였다. 이들 조약은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연맹 이사회에 의해 감독되었으며, 위반 시 외교적 압박이 가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감시 체계는 무력화되었고, 실제로 이행되지 않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셋째, 외부적 강제(external coercion)는 승인이나 가입 조건이 아닌, 외교적 혹은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여 특정 정책 수용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후 서방 국가들은 보스니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에 대해 강제적 소수자 보호 조치를 요구하였고, NATO의 개입을 통해 이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개입국의 정치적 의지와 자원의 지속 가능성에 따라 좌우되었고, 장기적인 제도화에는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넷째, 협약(convention)은 보편적 기준을 설정하고 국가들이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방식이다. 국제 인권 협약이나 유럽 인권 협약은 이와 같은 유형에 해당한다. 이는 국내 개혁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제적 압박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지만, 자국 내 정치적 환경에 따라 이행 수준이 크게 달라진다. 또한 강제력이나 집행력을 동반하지 않는 한,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4. 결론: 자율성과 개입 사이에서
이 장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베스트팔렌 모델은 국가 자율성을 원칙으로 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를 외부 간섭 없이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국제 질서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았다. 외부의 강압이나 초청에 의해 소수자 권리가 설정되는 경우가 다수 존재하였으며, 이는 국가 주권의 절대성에 대한 현실적 제약을 보여준다.
크래즈너는 특정한 개입 방식이 항상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계약 기반의 방식이 장기적 이행 가능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으며, 강압적 개입은 단기적 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지속성 측면에서는 취약하다고 평가한다. 협약은 국가의 정치 구조와 시민 사회의 역량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며, 구속력이 있는 국제적 사법 구조가 동반될 때 실효성이 높아진다.
궁극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는 순수한 자율성만으로는 형성되지 않으며, 외부 권위의 개입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국제 질서에서의 주권은 고정된 원칙이 아니라, 역사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가변적으로 구성되는 제도적 장치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소수자 권리이다.